혈육, 그리고 삶

서울, 우리 세 가족이 이 땅에 온지 꼭 10년이 되었다.

by 신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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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리 세 가족이 이 땅에 온지 꼭 10년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 나가면 한강이 흐르고 우리 집 13층에서 저 멀리 바라보면 남산타워가 보이는데 처음 서울에 왔을 때에는 한동안 한강을 대동강이라 했고 남산타워를 주체탑이라 불렀다가 정정 하군 했다. 36년 동안 살아온 평양곳곳의 지명들과 모습들이 금방 하루아침에 잊혀 질 리 만무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냥 내 나름대로 반 서울사람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우리 세 식구는 서울 와서 10년을 살았다.

옛날 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처음으로 그 말에도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진다.

아파트단지 옆에 지하철역이 들어오고 새 건물도 주변에 우줄우줄 많이 솟아나고 참 우리 동네도 많이 변했다. 폴더휴대폰 쓰던 우리도 스마트폰 쓰고, 무엇보다 내 아들은 중1학년생에서 대학4학년생이 되었으며 우리 층에 귀여운 어린이집 꼬마였던 옆집 애들이 쑥스러워 하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다.

강산이 변하는 그 나날동안 우리 세 식구가 단 하루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는, 단 하루도 잊어버린 적이 없는 그것은 이북에 있는 가족들 생각이었다.

‘이산가족’

이 뼈아프고 가슴 아픈 말은 결코 우리가 서울서 산 10년 동안에만 가슴에 사무친 말이 아니었음을 여기 와서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그 아픔은 이미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 38선이 그어져 남과 북으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 시절부터 죽는 날까지 어떤 이들의 한생전부에 걸쳐 마음속 한구석에서 자리한 아픔이었음을 절감했다.

1. 외삼촌

2012년 10월 대전국립헌충원의 한 묘비 앞에서 그의 부인 자식들, 그리고 나와 남편 아들이 묵념했다.

‘육군중령 조태영, 1928년생’, 나의 남편의 외삼촌이다.

광복직후인 1947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인 그가 소련군과 공산체제가 들어선 고향을 등지고 스무살 혈혈단신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월남하여 그 비극적이었던 전쟁부터 시작하여 한 평생 이 나라의 군인으로 복무하다 끝내 부모형제 한번 만나보지 못한 한을 가슴에 품은 채 남한 땅에 묻힌 것이다.

외삼촌 조태영은 전쟁 시기 국군정보장교로 활약했다고 했고 이북의 그의 형은 인민군문화부중대장으로 참전했다고 하니 형제지간에 이 무슨 비극인지, 총부리만 마주 안 겨누었다 뿐이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들이 이 나라 거의 모든 가족사들의 갈피갈피에 스며있다.

이북의 형제자매들과 친지들에게는 전쟁 전 행방불명자로 되어있던 사람, 그리고 남은 형제자매들의 운명에 항상 꼬리표로 붙어 그들의 인생에 실체 없는 의혹의 그림자로 따라다닌 그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육군중령으로 대전헌충원에 고이 잠들게 되었다.

우리가족이 서울에 와서 수소문 끝에 만난 외삼촌은 이미 치매가 많이 진행되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의 남편은 외삼촌이 한생을 거쳐 알고 싶어 했을 이북에 남은 그의 형제자매들의 운명에 대한, 가장 중요하게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못해 주는 것을 정말 슬프게 생각했다. 어느 해 광복절 날 외삼촌의 온 가족과 우리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면서 ‘알로하오에’ 라는 하와이민요라든가 그 노래를 합창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기억이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그 와중에도 “눈물 나, 눈물 나서 못 부르겠어” 라고 하며 눈시울을 적시던 외삼촌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잊혀져가는 기억의 끄트머리를 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필사적 본능의 모습이었을까. 딱 한 달만 치매의 바다에서 돌아와 속 시원하게 어머니와 형 동생 누이들의 이야기를 밤새워 가며 들려주고 들어주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나라의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분단비극의 한 증인이었던 한 사람이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났다.

2. 외할아버지

나의 남편의 외할아버지는 사진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아 손자들에게 있어서는 얼굴도 모르는 분이시다.

서울에 와서 남편은 건강이 안 좋아서 연세세브란스병원 치료를 한 2년간 받았다.

어느 날 병원에서 진료를 끝낸 주치의에게 우리 할아버지께서 광복 전 여기 세브란스의전을 나왔는데 그 당시 졸업생들 명단을 어떻게 하면 확인해 볼 수 있는지 물었다. 처음 병 치료를 시작할 때는 권위적이던 주치의도 치료기간이 일 년이 지나면서 많이 친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친절하게 행정실로 데리고 가서 담당자에게 용무를 직접 얘기했다.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조인규, 1900년생, 1919년~1925년 마취학과 수료.’

지금 21세기, 광복 후도 아니고 광복 전 3.1봉기운동이 있었던 그 해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했다는 그 졸업리스트를 보는 순간 잠시 먼 옛날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고 경의로움이라고 할까 숙연한 생각이 들었다.

세브란스의전은 지금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아닌가,

어려서부터 어머니 조태란에게서 옛말처럼 듣던 그 역사적 사실을 서울에 와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세브란스의전은 미국 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되었던 의학전문학교였던지라 졸업생들을 전국각지의 선교사병원에 파견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조인규도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에 있는 선교사병원이었던 미동병원에서 근무하다가 나중에 따로 개인병원은 차려서 광복 전에는 꽤 돈도 많고 실력 있는 의사였다 . 또 부인께서 황해도 재령나무리벌의 만석꾼 정씨지주의 딸이었던지라 선천군에서는 그야말로 대단한 유지였다. 조인규선생의 따님인 우리 어머니가 광복 전 상해에서 온 유명여선생에게서 개인피아노레슨 받았을 정도로 그 시절에는 부유한 가족이었다.

광복이 되고나서 이북에 소련군이 들어오고 공산당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위 그들이 말하는 기본계층에 속하지 못하는 지주, 자본가들과 관리들, 그리고 재산깨나 있던 사람들은 이남으로 가야할지 말지 갈팡질팡 했고 도무지 스물둘에서 갓난쟁이까지 아이들이 올망졸망 달린 가장이었던 외할아버지 조인규는 차마 월남의 결단을 못 내리고 있는 와중에 전쟁이 터졌다.

온 강토가 전쟁의 참화에 휩싸여 도대체 왜 이 나라 백성들이 이런 난리통을 겪어야 하는지 분간하기도 전에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죽었다. 매일매일 라디오를 들으며 전세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온 신경을 가다듬어 판단하려고 애쓰던 어느 날 밖에서 의사선생님 찾는다는 소리에 ‘왕진 청하러 왔는가?’ 하며 집안 평상복차림으로 대문 밖을 나섰던 외할아버지 조인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아, 이때로부터 조씨 가문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할까!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퇴각하던 인민군들이 곳곳에서 식자깨나 있고 재산깨나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우리랑 갈거야? 안갈거야? 물은 뒤 안간다고 하면 근처 어딘가로 끌고 가서 무자비하게 죽였던지 아니면 강제로 끌고 가다가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이 죽음이 훗날 조인규의 7남매 아들딸들의 가족문건에 말도 안 되는 ‘처단자가족’이라는 주홍글씨로 남아 그들의 운명을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 물론 대한민국 육군중령으로 생을 마감한 둘째아들 조태영을 제외하고.

외삼촌 조태영은 전후 창녕조씨 종친모임에서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나마 부친께서 선천군에서는 실력 있고 존경받던 유지였으니 생사확인이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3. 아버지와 어머니

한해도 다 저물어가던 작년 12월의 어느 날 새벽 아들에게 사과를 갈아서 담은 컵을 들고 들어갔는데 잠자리에서 일어나며 “엄마 네이버검색창에 할아버지 이름 쳐봐, 우리 할아버지가 인터넷에 나와” 라고 하는 것이었다. 황황히 휴대폰으로 ‘장영환’을 검색했다. 정말 동명인은 많았지만 제일 위에 떠있는 자료는 분명히 나의 남편의 아버지 장영환의 생애가 맞았다.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인 아버지 장영환은 그림 그리는 천성적인 재주를 타고난 분 이었다.

아버지는 광복 전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그야말로 야생에서 동물들이 살기위해 생존경쟁 하듯이 이리 딩굴리고 저리 딩굴리며 자라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고향마을 가까이에 흐르는 압록강으로는 떼목들이 엄청 내렸는데 가난했던 아버지와 그의 형은 떼목이 어느 지점가까이 내려올 때마다 낫을 등에 지고 그 거센 물결을 헤가르며 헤엄쳐 무섭게 흘러가는 물살 속에서 떼목에 붙어있는 껍질을 벗겨내어 가지고 간 마대에 담아 다시 물가로 돌아오는 위험천만한 일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고 했다.

“그 나무껍질은 왜요?”

“땔감이 없어서...”

형이 낫을 들고 강가로 가는 기미만 보이면 여덟 살도 안 되는 동생이었던 아버지가 따라나섰고 형은 항상 따라오지 말라 고 쥐어박고 쥐어 박힌 동생은 앙앙 울면서 형이 보이지 않으면 몰래 강가로 쫓아가서 어느새 시퍼런 강물에 풍덩 뛰어들 군 했다. 그렇게 가난했던 시절

천성이었는지 코흘리개시절 자기도 모르게 수탉을 보면 땅위에다 뾰족한 돌멩이로 수탉을 그리고 강아지를 보면 강아지를 그리고, 그려도 그려도 해소되지 않는 그림에 대한 애착은 광복 후 신의주경제전문학교 수료과정에 그 자질이 인정되어 평양미술대학 입학이라는 넓고 탄탄한 인생의 첫 주로에 들어서는 자양분이 되었다.

대학졸업 후 본교의 교원으로 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던 아버지 장영환은 1958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만화영화제작단 연출가로 일함과 동시에 당시 평양음악무용대학 피아노과를 나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교향악단 피아니스트였던 조인규의 셋째 딸 조태란과 결혼하였다.

나와 남편이 대학시절 학과정의 필수코스였던 대학생교도대라고 하는 군복무를 80미리포병부대에서 6개월간 한 적이 있다. 교양시간이라고 하는 어느 날 저녁에 단체로 TV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새로 나온 만화영화 ‘버들그네’가 방영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연출과 영화문학, 책임미술, 모두 장영환 자막이 올라가고 있을 때 같이 시청하던 대학동기들의 찬탄과 박수가 나의 남편에게 쏠렸다.

아버지 장영환은 북한만화영화계에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초 만화영화창시자로서 첫 만화영화인 ‘금도끼와 쇠도끼’, 김일성이 청소년시절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던 동화를 만화로 각색한 그 유명한 ‘나비와 수탉’을 비롯하여 ‘두 장군 이야기’, ‘코끼리와 곰’, ‘영리한 너구리’ 등 100여 편의 만화영화를 창작하여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그야말로 승승장구의 길을 걸어왔다.


나의 남편의 대학시절 어느 해 겨울 등교하려고 분주히 서두르고 있는데 거실 옷걸이에 걸어놓았던 목도리가 없었다. 옷을 입으면서도 무슨 작품에 대한 생각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아버지가 당신 목도리를 두르고 아들 목도리를 또 두르고 외투를 입고 출근한 이 일화는 가족들 식사자리에서 종종 우스개 얘기로 화제가 되군 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우리 직장 어떤 동료는 목도리에 외투는 입고 나왔는데 버스정류장에서 하도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봐서 왜 그런가 하며 자기 아래위를 흩어보다가 내복만 입고 바지를 안 입고 나온 사실에 경악해서 집으로 도로 들어갔다고 웃곤 했다.

김일성일가를 우상화하고 찬양해야 하는 예술영화와 드라마와 달리 만화영화는 그런 정치적 내용을 주제로 하지 않아도 되는 부담감이 적어 창작가에게는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이고 북한주민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시청의 즐거움과 화제거리의 재미를 주는 예술계의 꽃이었다.

북한주민 모두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만화영화 ‘소년장수’의 위력은 대단했다. 텔레비죤이 없는 집 애들과 어른들은 ‘소년장수’가 방영되는 시간이면 염치불구하고 TV있는 집에 미리부터 가 앉아 시청시간을 기다리군 했다. 하물며 수다 떠는 시간에 50부작인 이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의 운명에 대해 왈가불가하고 부정캐릭터였던 ‘호비’에게 북한영화배우들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칭호인 인민배우라는 명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작품속의 ‘호비’의 연기가 인민배우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할 정도로 북한만화영화는 그렇게 인기가 있었고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나와 남편의 어린 시절에 창작된 아동영화는 우리 아들의 유년기까지도 사랑을 받았는데 아들은 지금도 그 시절의 만화영화OST 곡들을 사랑하고 즐겨 피아노를 탄다.

1972년 당시 문화예술계를 총괄하여 지휘하던 김정일에게서 직접 공훈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았고 이렇듯 만화영화계에서 가장 높고 중요한 자리에서 국내만화뿐 아니라 프랑스와 같은 서구권 나라들에서도 수주 받아 만화수출사업에서도 새로운 훈풍을 주도하고 있던 아버지 장영환에게 1980년대 중반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지도원 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에 따른 소위 간부사업이 진행되었다. 결과는 통보도 되지 않았지만 몇 달 안 되어 부인 조태란의 계급적성분이 ‘처단자가족’ 으로 되어 있고 처남 조태영이 전쟁 전 행방불명자라는 이유로 간부사업에서 낙선되었다는 사실을 음으로 양으로 조심조심 알아본 결과 겨우 알게 되었다.

평양음대 피아노과 출신인 어머니 조태란은 내가 남편을 알게 된 직 후부터 나의 마음에 가장 존경하고 동경하는 엘리트로 자리 잡은 존재였다. 소녀시절 문학소녀로 작가라는 소중한 꿈을 꾸어온 나에게 어머니 조태란은 피아니스트라는 자기의 꿈을 살아있는 동안에 완성한, 부자든 아니든, 지식이 있든 없든, 훌륭한 남편을 가졌든 못 가졌든 뭇 여성들의 시샘과 찬탄을 한 몸에 받은 그런 분으로 각인되어 왔었다.

물론 어머니 조태란은 김정일의 문화예술계 출현으로 된서리를 맞은 예술인이기도 하다. 대학졸업 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교향악단 피아니스트로 우아하고 도도한 자리에 있던 조태란은 1960년대 중반 문학예술계에서 출신성분이 불건전한 자는 선동선전의 기수인 예술인의 대오에 있을 수 없다는 김정일의 지시로 하루아침에 피아니스트의 당당한 자리를 잃어버렸다.

어머니 조태란은 광복 전 여학교시절부터 장난기 많고 담이 크며 부자 집 여식이었지만 소심하고 나약 하기는 커녕 당차고 도전적이며 긍정적성격의 소유자였다.

마음에 있던 아버지 장영환의 혼자 사는 집으로 수시로 찾아와 마음의 문을 먼저 열고 결혼에 골인하였으며 피아니스트의 지위를 박탈당하고도 주저 없이 양재기술을 습득하여 혼자서 옷을 재단하고 재봉질까지 해서 가정살림에 보탬 했으며 그 시절 이 나라의 가장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오직 직장과 일밖에 모르는 남편을 탓 하기는 고사하고 아들딸 세 남매를 남다른 사랑을 담아 키워 모두 대학교를 졸업시켰으며 나중에는 손주인 내 아들의 지금이 있게 한 훌륭한 어머니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할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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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조태란에게 피아노를 떼어놓은 인생은 생각할 수 없다. 문학을 사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 전자자동화공학을 전공한 내가 남편과 결혼 후 바이엘이니, 체르니니 쏘나티네 등 아이들 피아노교습곡들과 80년대 회오리바람처럼 유행했던 리챠드 클레이더만의 그 아름다운 연주곡들은 무수히 들어 웬만한 곡들은 선율을 어중간히 외우고 있을 정도로 우리 집에는 피아노소리가 멈출 새가 없었는데 그렇게 어머니는 지침이 없이 피아노를 쳤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내내 하시던 어머니의 이야기.

“당신이 원하면 시원하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 줄게요, 나 때문에 그 좋은데 못가서 되겠수? 우리 아버지 때문에 간부사업 안된다고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두루마기에 각반차고 드나들던 그 많은 사람들 나중 우리 어머니한테서 들어보니 뭐 만주에서 독립군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우리 아버지 독립군에 돈 대주었음 주었지 무슨 죄가 있어 인민군에게 처단 될 사람은 아니우, 아마 무슨 청년단인가 그런 막 되먹은 젊은 놈들한테 당했다는 소문도 있수.”

내가 어렸을 적인 1970년대 수도 없이 보아온 것이 같은 학급이나 주변의 친구들의 집이 갑자기 지방으로 쫓겨 간다고 울먹이며 얘기하던 모습이고 그 애들이 80년대 초중반에 촌스러운 시골아이의 차림으로 어쩌다 평양에 올라왔다가 나의 집 문 밖에서 보고 싶어 왔다고 우물쭈물 얘기하던 풍경이다. 어린 마음에 계급이니 출신성분이니 이런 말마디들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었지만 내 엄마가 “전쟁 때 치안대에 불 때주고 밥 해준 사람도 마구마구 지방으로 내쫓는다.” 고 하던 이야기는 그런 것도 무슨 죄가 되나? 는 윗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 스스로 자리 잡았었다.

비단 외할아버지 조인규와 외삼촌 조태영으로 인한 가족의 불운은 어머니 조태란과 그의 남편 장영환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고 김책공업대학 교수로 있던 맏외삼촌과 평양의대병원 소아과의사였던 이모, 그리고 황해제철소 기술직으로 있던 셋째외삼촌, 지방 어느 대학교 교수였던 작은 이모를 비롯한 온 형제자매에게 찾아온 운명의 소용돌이었다.

평의대병원 의사인 이모만 제외한 그들 가족 모두 광산이나 농촌으로 추방되어 그냥 비참한 정도가 아니라 시시각각 불온분자로 의심받고 툭하면 사상검열의 비판무대에 올려놓아져 모욕적인 인신공격의 발언을 일상으로 들으며 제명을 다 살지 못하고 일찌감치 저세상으로 서둘러 갔다.

적을 많이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는지 아니면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분위기로 인한 정책이었는지 또 아니면 시집간 여자는 출가외인이라는 유교적 전통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시집한 딸들인 어머니 조태란과 평의대병원 의사였던 이모는 추방에서 제외되어 그나마 남편과 자식들 곁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 장영환은 조금도 처가를 원망하거나 중앙당 선전부에 간부로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천성으로 좋아하는 그림과 만화를 계속해서 할 수 있는데 대한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물론 처가의 안 좋은 이력으로 젊은 후배들에게 계속해서 흥행한 만화영화의 연출과 책임미술가 자리를 뺏기기 일쑤였지만 그다지 깊은 회한도 없이 만 60세 되던 1990년 5월 31일 떳떳하게 퇴직의 날을 맞이했다.

최근에 10년 전 읽었던 박경리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를 두 달 동안에 걸쳐서 다시 읽었다.

연해주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평양, 평양에서 서울, 서울에서 경남 하동과 진주까지 거침없이 오고 가던 일제시기가 왠지 헛헛하게 다가왔으며 또 소설의 제일 마지막장면이 왠지 쓸쓸하게 읽혀졌다.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두루마기와 모자는 어디다 벗어 던졌는지 동저고리 바람으로 덩실덩실 춤추며 나룻터에서 마을길로 올라오며 장서방이 하는 말이다. 그 해방으로 장장 20권의 대하소설은 막을 내렸는데.

나는 생각했다. 해방을 맞아 그들의 삶이 어떻게 이어졌을까? 독립을 했다고 마냥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얼마 안 있어 나라의 허리에 그어질 38선으로 말미암아 돌변할 남북정세와 또 머지않아 겪게 될 전쟁의 비극에 그 누구도 예외 없이 휘말리게 될 부정할 수 없는 이 나라의 역사 속에 작품속의 주요인물들을 하나하나 세워보며 그들의 운명을 생각했다.

마치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여행한 사람이 옛일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나는 광복 때도 아니고 전쟁 때도 아니고 7,80년대도 아닌 지금에 있는 사람이니까.

과거의 그 모든 끔찍한 일들도 이렇게 담담하게 바라보며 내일은 그냥 화창한 봄 만이기를 어릴 적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는 것인가.

남편을 따라 아들을 데리고 중국의 심천공항에서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며 과연 이 길이 옳은 길인지, 우리 세 식구의 탈출로 인해 “처단자가족”에 이어 “탈북자가족” 으로 또다시 낙인 될 평양의 내 가족의 그 지굿지굿한 가족문건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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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내 가족의 후손 중 그 누가 또 나와 같은 회상을 하며 선대의 탈출로 하여 자기들의 부모나 형제들이 겪은 암담한 이야기를 가슴 아프게 펼쳐놓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죄악이 될까?

지금은 겨울이다. 올 겨울엔 어떻게 된 건지 눈도 안 오고 별로 춥지도 않다. 내일모레부터 영하 10도로 좀 추워진다고 한다. 어쨌거나 삼한사온 이라던 이 땅의 겨울도 지금은 오락가락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제 마음대로 추웠다 따뜻해졌다 하면서 지나는지 오래 된 것 같다.

춘하추동 사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니 엄혹한 겨울은 때가 되면 가고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은 반드시 올 것이다.

2017년 1월 10일 서울에서 신관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