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지 1주일 정도 되었다. 물론, 아직은 입사 초기라서 많은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 사기 사건의 사건기록을 보고 증거기록을 요약, 정리하는 일과, 수임 검토 중인 사건에 대한 간략한 법리검토 일이 주어졌다. 사건기록이 수천 쪽에 이르는 사건이라, 사건기록을 읽고, 표에다가 내용을 요약해놓는 데에만 며칠이 걸렸다. 밤 8~9시까지 야근을 했음은 물론이다. 솔직히 말하면 객관적으로 말하면 아직까지는 로펌 변호사 치고는 정말 일이 별로 없는 축에 속한다. 어느 파트너 변호사님께서 '곧 바빠질테니 지금을 즐기라'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곧 바빠질테니'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로펌에 들어와서 처음 일을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단순노동에 가까운 일을 주면서 일종의 적응기를 주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다행히도 수천 쪽에 달하는 기록을 보며 수백 개의 증거목록을 요약, 정리한 자료를 파트너 변호사님께 보내드렸는데,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라는 답장을 받았다. 혹여나 '요약이라고 하기엔 내용이 너무 많다.'라는 답장을 들을까봐 걱정했다. 나 포함해서 변호사만 5명이 투입되는 조금은 큰 사건이라, 내가 혹시나 걸림돌이나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차였다. 아무래도 신입이다 보니, 어떻게든 회사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 3개월만 지나도 달라지겠지만.
회사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하는 일이, 내가 가는 길이 과연 맞는 일인가에 대한 생각 역시 든다. 애당초 공익인권을 다루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초심과 너무 멀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다. 물론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받으면서 전적으로 공익인권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각오는 되어 있지 않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변호사의 일을 하면서 겸업으로라도 공익인권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지금 회사는 '대형로펌이라고 해도 거짓말은 아닌' 회사 정도의 인식이 있는 곳이다. 공익인권과 그리 가깝지 않은 곳이다.
처음 맡게 된 사건도 사실은 가상자산을 이용한 전국적인 사기사건이다. 의뢰인은 가상자산 업체의 대표이고, 전국적으로 피해자가 수십 명, 피해금액도 수십 억원에 달하는 사건이다. 수천 쪽에 달하는 사건기록을 모두 살펴본 입장에서, 전적으로 사견이지만, 진실은 '사업 실패'보다는 '사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뢰인의 대리인으로서 우리는 무죄 주장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많은 피해자들이 사기로 큰 돈을 잃은 상황이고, 여전히 상당수 피해자에 대한 피해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변호인으로서 '사업이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일 뿐, 사기가 아니였다.'라고 주장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썩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당연히 누구든지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고, 당연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도 있고, 변호인이라면 의뢰인의 뜻에 따라 무죄를 주장하는 의뢰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논리를 개발하여야 한다. 나쁜 사람이라는 이유로 변호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 변호사의 직업 윤리이다. 하지만 사건기록을 보면 범죄를 저질렀다고 상당히 의심되는 사람이고, 그 범죄의 피해자가 많고 피해금액이 크고, 여전히 큰 로펌을 선임할 수 있을 만큼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을 굳이 '나까지' 나서서 도와줘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게 주어진 능력을 차라리 피해자들을 위해 쓰는 게 좀 더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아닐까.
똑같은 고민을 군법무관으로 일하던 시절 이른바 '과거사 사건'을 수행하면서 한 적이 있다. 국가의 소송수행자로서 법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뻔한 소멸시효 항변을 굳이 해야 하고, 굳이 위자료가 과다하다고 주장해야 하고, 굳이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주장을 해야 하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군인 신분이였기 때문에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문민통제의 원칙에 따라서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장관들, 그리고 장관들이 임명한 민간 관료들의 '위법하지 않은' 명령을 군인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국가의 소송수행자가 과거사 사건 피해자나 유족들이 제기한 국가배상 소송에서 소멸시효 항변 등 법리적 주장을 펼치는 것 자체가 '위법'은 아닌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대부분의 과거사 관련 국가배상소송에서 국가 측의 소멸시효항변은 99%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도, 나름대로 스스로의 정당화 논리가 되었다. '내가 하는 주장이 피해자, 유족들을 불편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어차피 내가 하는 주장은 모두 법원에서 기각당할 거니까, 거의 대부분 국가가 패소하는 사건이니까, 이런 변론을 하는 것도 괜찮을 거야. 원고 대리인도, 재판부도 상황을 이해하겠지. 이건 프로레슬링 같은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국가의 소송수행자가 소멸시효 항변을 하고, 청구하는 위자료가 과다하다는 주장을 하고,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주장을 하는 것이 원고 당사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였다. 원고 대리인이야 법조인이니, 피고 소송수행자가 그러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겠지만, 비법조인인 원고들까지 '그래 이건 프로레슬링 같은 거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니까. 마찬가지로 이번 가상자산 사기 사건도, 아마도 추측컨대 아무리 변호사 5명이 용을 써도 피고인이 무죄판결을 받기는 힘들어 보인다. 수임료를 받았으니 최선을 다하긴 해야겠지만, 결과는 예상된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고, 우리는 수임료를 두둑히 받았으니 '프로'답게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의뢰인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 역시 일종의 프로레슬링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기에는 피해자가 많고 피해금액이 상당하다. 물론 의뢰인이 무죄 주장을 하는 것과 별개로 피해변제와 합의를 시도하고는 있지만 모두에게 원금을 보상해주긴 힘들지도 모른다. 큰 로펌에서 다수의 변호사를 선임할 돈을 차라리 합의금으로 쓰고 납작 엎드리고 선처를 구하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유죄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애써 의뢰인을 위한 방어논리를 찾아보려고 애쓰는 내 모습이 약간은 웃기다.
물론 나는 프로니까, 직업 윤리에 따라서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굳이 다단계 투자사기범과 같은 사람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커리어를 만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든다. 큰 로펌에 계속 재직하면 그런 고민은 반복될지도 모른다. 사실은 큰 로펌에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전역 전에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법조계에서 대형 로펌 경력이 1년이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클 것이다.', '소수자들을 위한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기득권의 사고방식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첫 직장이 향후 커리어를 좌우하는 나라이다.', '일단 돈 좀 모으고 생각해 보자'라고 말하곤 했다.
주변 친구들이 십중팔구는 그렇게 조언해주곤 했으니, 내 마음도 흔들려서 결국 현재 다니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2~3년 정도 다닌 이후에는, 조금 더 공익인권 색깔이 강한 로펌(이른바 '민변계 로펌')으로 이직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기득권을 위해 노력하는 변호사는 이미 차고 넘치는데 굳이 나까지 거기에 힘을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일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한다는 관점에서도, 내가 기득권을 위해 변론하는 것은 나에게 별로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친구들에게 말하면 또, '틀린 말은 아닌데 3년은 너무 짧지 않냐', '집은 사고 생각해 보자'라고 조언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또 흔들린다. 돈을 많이 벌고 기부나 열심히 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삶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높은 연봉에 스스로가 익숙해져(?)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도 큰 로펌에서 버틸 수만 있다면 조직 자체가 나에게 방어막과 같은 안락함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정석적인 엘리트코스를 따라가는 것이 제일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흔한 변호사 한 명이 되는 것은 아닌가, 내가 우리 사회의 모순을 뿌리채 흔들지는 못해도, 고사리손 같은 도움이라도 줄 수는 있을 텐데, 그것조차 하지 않으려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일단 스스로 전환점이라고 염두에 둔 2~3년 정도는 현재의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을 해야 함이 마땅하다. 정말 억울한 사람, 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을 대리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범죄자, 사회적 강자에 속하는 사람을 대리하는 일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고, 본인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다만 나의 고민은, '나쁜 사람을 변호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나쁜 사람을 굳이 내가 변호해야 하는가'이다. 물론, 아무리 사건기록을 열심히 읽어봐도 모든 진실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정말 사업 실패일지도?
사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배부른 고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음주부터 일폭탄이 쏟아져서 그런 사색을 할 여유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또, '상'꼰대이자 기성세대 그 자체인 어느 파트너 변호사가 나를 심리적으로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아직 그런 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험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사람이 바쁘면 그런 심오한 고민을 할 틈이 없다. 차라리 마음속으로 정해 둔 2~3년 동안은 적당히 바쁘고, 적당히 야근하고, 동시에 적당히 운동하고, 적당히 주변 사람 챙기면서 바쁘게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오늘 사촌형이 준 공기청정기를 두러 잠깐 사무실에 갔는데, 어느 변호사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O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