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노동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모의재판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근로기준법을 주제로 모의재판 대본을 작성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들의 <노동자의 변호사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주류 공론장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 노동의 문제들에 대해 알게 될 수 있었다. 사실 부끄럽게도 로펌에 다니기 이전에 제대로 된 노동을 해본 적이 없다. 방학 때 사촌동생들의 과외를 해 주거나, 학교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오는 당일치기 알바(캠퍼스 투어, 시험감독, 교내 기관들의 단순노동)를 해 보았을 뿐이다. 그래서 노동에 대해 말을 얹기가 되게 조심스럽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대략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스스로를 진보좌파라고 정체화하기 시작하였다. 고등학생 시절 <경향신문>과 <시사IN>을 탐독하고, <노동자의 변호사들>을 읽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서 노동이란 응당 이래야 한다는 막연한 관념들이 생겨났다. 대학생 시절 학생회 집행부원, 진보정당 학생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고, 생각이 조금은 강화되기도 하였지만, 어쩌면 '노동'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조금은 단편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진보와 보수가 각각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이 책을 추천한다.
사실, 이 책의 거의 2/3가 되는 지점까지도, 조금은 뻔한 문제의식을 가진 책이라고 감히 생각했다. 어쨌거나 한국사회의 경제규모를 고려하였을 때 오늘날 노동자의 처우는 너무나도 열악하기만 하고, 특히 일부 대기업 정규직을 제외한 대부분 노동자들이 고용 불안정과 산업재해, 노동조합 탄압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그런 '훌륭한' 내용을 담은 책이 아닌가. 학부생 시절 최장집 교수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안타까우면서도 분개하고, 자본가들을 얼른 단두대로 보내야 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운 노동의 현실과 이를 외면하는 자본과 정치권력의 문제를 다룬 책인줄 알았다.
하지만 책이 마지막으로 접어들수록, 진보좌파로서 내가 가졌던 다소 도식적인 생각(노동=선, 자본=악)의 구도가 조금은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들이 많았다. 사실은 노동도 자본도 그 속에서 다양하게 분화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대기업 정규직으로 대변되는 상층 노동과, 그 외의 하층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는 다를 수 있다(특히 인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노-노 갈등이 심화된 사례가 있다). 자본 역시 대자본과 중소기업, 영세자영업자는 동일하게 자본이라고 묶이기에는 다른 이해관계를 갖는다. 편의점주와 편의점 알바생의 대립관계는 가시적이지만, 사실 편의점주와 가맹본부의 대립관계도 중요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 '한국 노동의 딜레마'는 정년제, 호봉제, 주휴수당이라는, 대단히 민감한 노동계 현안을 정면으로 마주치고 있다. 사실, 정치의 공간에서 진보좌파는 정치하기 참 힘들다. 보수 정치인들은 모든 것을 자유시장에 맡기자고, 모든 규제를 없애자고,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만 외칠 뿐이다. 자유방임을 외치는 것은 쉽고, 편리하다. 진보 정치인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보수우파의 '자유지상주의' 도그마에 균열을 내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허나, 진보좌파 내부의 공론장에서 진보좌파가 노동의 문제에 대해 너무 편리한 구호만을 내걸었던 것은 아닐까? 자본가들의 풍족한 곳간을 열면 모든 게 해결될까?
'비정규직 전면 철폐' 같은 구호를 외치며, 자본에게 노동의 몫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만 하는 것은, 사실 저들 보수우파들이 모든 것을 자유에, 시장에, 자본에 맡기려는 것과 마찬가지의 '지적 게으름'이 아닌가.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에서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대기업 사측과 어떤 식으로 묵시적 '담합'을 벌여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강화시켰는지에 대한 서술이 있다. 조합원들에 대한 고용안정과 고임금을 보장하는 대신, 회사는 손해를 벌충하기 위해 많은 작업들을 외주화한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사측이 곳간을 열어 그들도 정규직으로 채용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어떻게 보면,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들이 사측과의 묵시적 담합을 통해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을 쌓아올리고, 그 성벽에 들어오지 못한 비정규직, 불법파견노동자, 하청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우를 강제받도록 '방조'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에서 외치듯이 투쟁을 통해 자본가들의 곳간을 열어서 자본가들이 성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성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면 된다. 하지만, 일국사회주의가 실패했듯이 일국자본주의도 실패했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아무리 한국의 대자본이라고 하더라도 글로벌한 차원의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어쩌면 '한국' 자본가들의 곳간은 화수분이 아닐지도?
당연히 진보좌파들의 국제연대를 통한 세계적인 체제변화 투쟁이 병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부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을 쌓아올리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애초에 '부르주아'라는 말 자체가 '성 안 사람'이라는 뜻이 아닌가. 최대한 많은 노동자들을 '성 안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는 굉장히 선하고 좋으나,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대자본들마저 치열하게 경쟁 중인 상황이라 모든 노동자들을 '성 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일부 노동자들에게 유사-특권을 부여하는 '성벽'을 없애는 것이 방법이 아니겠는가. 다만, 하향평준화는 절대 경계해야 한다.
보수우파 자본가들 역시 '성벽'을 없애는 것에 매우 찬성하고 싶을 테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진보좌파 내에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성벽'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에 극도의 경계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감히 자본가들과 똑같은 주장을 하다니!'라는 말에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물론 조봉암 선생은 '북한에서 밥을 밥이라고 한다고, 우리가 밥을 죽이라고 부를 순 없지 않느냐'라고 말하였다지만, 아무래도 전통적인 진보좌파의 관점에서는 영 꺼림찍하기 마련이다. 토니 블레어와 같은 이른바 '제3의 길'을 주장하던 좌파 정치인들이 결국에는 신자유주의로의 퇴행에 기여하였기도 했고..
하지만, 보수우파와 똑같은 주장이라는 이유로 그 주장을 할 수 없다면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는 꼴이다. 애초에 보수우파의 비전과 진보좌파의 비전은 '똑같은' 것이 아니다. 고용유연화는 반드시 고용보험을 비롯한 사회보험의 강화, 직업교육 및 평생교육의 강화와 동반되어야 한다. 호봉제의 폐지와 직무급제의 도입은 '동일 임금, 동일 노동'이라는 명확한 지향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한 주휴수당의 폐지는 그에 합당한 최저임금의 인상을 동반하여야 하고, 최저임금 인상은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보호정책을 동반하여야 한다. 한편으로, 한국에서의 노동자 권익 강화운동은 국제연대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분명 이러한 변화는 느리고 지지부진하고 오랜 대화와 타협이 동반되어야 할 테다. 하지만 진보좌파는 보수우파와 달라야 한다. 지적 게으름과 타성에 젖어 있기에는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엄중하다. 어차피 진보정당은 이제 내려갈 곳도 없다. 과감한 도전과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2004년 진보정당의 첫 원내 진출로부터 이제 20년이 흘렀다. 고 노회찬 의원이 말했듯이 슬슬 시커멓고 발암물질로 잔뜩 낀 불판을 갈아야 할 시기가 왔다. 과감히 금기를 깨 부수는 그런 진보정당이 나타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