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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곰님 Oct 07. 2024

어쩜 이렇게 예쁘니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한거지?

쨍한 한낮의 태양을 듬뿍 받으며 농작물들이 빠르게 자란다. 이 말은 인맥 넓은 어머님이 각종 야채들을 얻어서 나에게도 나누어주는 시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어머님은 이른 저녁을 드시고 친구와 운동삼아 걸으신다. 여러 개의 걷기 코스가 있는데 그중 우리 집 앞을 지나는 코스도 있는 듯하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오니 야채 봉지가 식탁에 올려져 있다. 딸에게 물으니 할머니가 집 앞을 지나가다가 전화를 하셨고 받아왔다는 것이다.


둥근 호박이 2개다. 키친타월로 한번 감싸고 하얀 봉지에 담겨 있다. 집에서 음식을 자주 먹지 않는 우리 집 사정을 아시고 오래 보관하라고 늘 이렇게 주신다. 한 번은 냉이를 주신 적이 있는데 된장찌개용에 맞게 적은 양을 일일이 랩에 포장을 해서 주신다. 이런 세심함에 나는 늘 감사하다.


저녁으로 호박을 볶아먹을 겸 키친타월에 감싸있는 호박 하나를 꺼낸다. 우리 집 한 끼 반찬 양으로 딱 적당한 사이즈다. 키친타월을 벗긴다.


"어머, 호박이 어쩜 이렇게 예쁘니. 딸, 이리 와 와. 호박이 너무 예쁘다. 그렇지?"


나도 모르게 호박을 보며 예쁘다는 말을 한다.'내가 지금 뭐라고 말한 거지? 호박이 예쁘다고?'


순간 신혼 초 시댁에 갔을 때 어머님이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생각났다. 어머님은 지인 집에서 야채를 잔뜩 얻었다며 가지러 오라고 하신다. 식탁 위 검은 봉지에 상추, 오이, 애호박이 가득이다. 어머님도 막 집에 오신 것 같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드시며,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며 검은 봉지를 활짝 열어두신다.


"어머, 호박이 어쩜 이렇게 예쁘니. 봉지에 담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호박이 예쁘네."


하며 어머님이 감탄을 하신다. 반들반들하며 크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딱 적당한 사이즈의 둥근 호박을 만지며 어머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순간 정지된다. 호박이 예쁘다는 표현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책에서 봤을 수도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진심 가득한 표현을 들으니 순간 당황한다.  


"네? 호박을 잘 키웠네요.^^"


나는 호박이 예쁘다고 말하지는 않고 생산자를 칭찬한다. 그때는 어머님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 나도 그 말을 하고 있다. 내가 왜 그렇게 말했을까, 다른 문장은 없었던 것일까 생각하지만 답은 없다. 갑자기 호박이 예뻐 보여서 예쁘다고 말했을 뿐이다.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찌 보면 쉬운 말 같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처럼 단순한 말들을 어렵게 이해해 가는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요즘 나는 '우리는 누군가와 반드시 두 번 만나는데, 한 번은 서로 같은 나이였을 때, 다른 한 번은 나중에 상대의 나이가 됐을 때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살다 보면 가끔은 두 번째 만남이 훨씬 좋기도 하다는 것도. 그 '좋음'은 슬픔을 동반한 좋음인 경우가 많지만.




작가의 말처럼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단순한 말을 어렵게 이해하는 과정 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는 일은 그를 이해하는 일이라 기쁜 일이지만, 나의 나이 들었음을 인식하는 일이기에 조금은 슬픈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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