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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Nov 27. 2022

세대 담론의 비극에 대하여

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화를 내고 있는가

  어떠한 형태로든 뉴스를 챙겨보려고 하는 습관을 만든 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 간다. 하지만 최근처럼 뉴스를 볼 때 흥미보다 의무감으로 본 적이 없었음을 느낀다. TV 뉴스보다 인터넷 기사를 주로 보게 되면서 자극적인 타이틀이 걸린 기사가 화면 곳곳에 침투해 있어 피로감이 누적된 것이 컸다. 정말 유용한 내용이 들어 있는 뉴스를 찾아내기 위해 몇 번이고 화면을 넘겨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떨어질 만큼 떨어진 것 같은 주식시장이 왜 제대로 반등하지 못하는지에 관한 설명이나, 혹은 정부에서 부동산 대책을 내놓아도 소비 심리가 살아나지 않아 고점에 집을 산 사람들이 아우성이라는 일화를 소개하는 기사들은 언제나 사회-경제 톱 화면 부근의 어딘가에 제목만 살짝 바꾸어서 머물러 있다. 시장 심리의 경색이 불러온 지금의 조건과 그러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기사는 사람들의 시장 참여를 주저하게 만든다. 이러한 악순환은 녹록지 않은 작금의 경제 환경을 더욱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가 어렵다는 말만큼이나 지겨울 정도로 접할 수 있는 테마가 바로 세대 갈등이다.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타이틀을 단 기사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비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는 기사젊은이들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기사에 파묻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전자가 아닌 후자의 기사에 몰려들어 댓글란과 공감 아이콘에 손가락을 올린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과 좀 더 어울리기 쉽다고 느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인 감정들이 가면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도 대체로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친밀한 인간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경우에 해당한다. 청년들만 있는 자리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는 기성세대 상사에 대한 반감이 섞인 말을 들을 수 있고, 중년들만 있는 자리에서는 사회생활의 오랜 불문율을 지키지 않는 젊은이들에 대한 비아냥을 들을 수 있는 식이다.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 서로에게 창을 들이미는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을까?



금융 위기의 영향으로 여러 나라의 젊은 세대가 받는 소득이 정체되거나 역전되었다. 반면 지난 10년간 증가한 부의 대부분은 나이 든 세대들이 차지했다. … 가장 놀라운 것은 각기 30대 초반일 때 밀레니얼 세대의 실질 가처분 소득이 X세대 소득보다 4퍼센트 낮아졌다는 점이다. 금융 위기로 인해 진보가 정체된 데 그치지 않고 역전된 것이다.
(바비 더피 著 『세대 감각(e북)』, 어크로스, 1장 '자산: 불경기는 우리를 어떻게 갈라놓는가'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역시 먹고사는 문제일 것이다. 21세기가 열린 이후 우리나라는 이미 몸집이 제법 커진 상태였고, 예전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나라 전체의 살림은 꾸준히 나아졌지만, 과거와 같은 속도로 파이가 커지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불만을 필연적으로 야기할 터였다.


  세계 경제가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만성적인 침체 상태를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통해 억지로 부양해야 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무역의 사이클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도 이를 비켜가지 못했다. 고용 부진을 불러온 장기적인 저성장 상태에서 갑자기 닥쳐온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은 엄청난 여파를 몰고 왔다.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도 유동성이 범람하는 경제 환경이 조성되었고, 그 결과로 이미 자산을 들고 있었거나 자산시장에 빠르게 진입해 매물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경제력을 가진 이들이 뜻밖의 수혜자가 되었다.


  반면 실물경제가 얼어붙은 타이밍에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세대와 그보다 낮은 연령대의 세대는 터무니없이 올라가는 자산 가격을 보면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착실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집을 마련하고, 결혼을 한 뒤에 소박하게 가정을 이루면서 산다는 '평범한' 삶의 계획이 시작부터 어긋났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 높아진 현실의 벽 앞에서 그들은 N포 세대 중 한 명이 되거나 인생 역전의 가능성을 꿈꾸며 코인 시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월급 빼고 다 오르는 세상'에서 그나마 안전하게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고연봉 직종에 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얼어붙은 고용 환경의 문 앞에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수많은 청년들이 집결함으로써, 결국 그들 중 대다수가 시장의 잔혹함을 실감해야 했다. 취업난으로 소득을 올리기 시작하는 시기가 늦어지고, 물가 급등으로 구매력이 잠식되어 돈을 모으기도 어려워지자 청년들은 미래를 그리는 것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토로할 길이 없는 막막함은 배출구를 찾지 못하고 길을 헤매다 분노의 형태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나이 들었다고 더 많은 월급에 성과까지 챙겨가는 건 '꼰대' 아닌가
vs
기본적인 예의까지 일일이 가르쳐줘야 하나

  높아지는 젊은이들의 불만에 기성세대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이미 사회생활에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그들은, 이전부터 내려오던 유무형의 사회 규범과 그것을 지켜온 세대에 대한 날 선 목소리를 일종의 도전장으로 받아들였다. 나이 든 세대는 젊은이들보다 어려운 시대에 성장해 사회의 뼈대를 지탱해 왔음을 강조하며, 젊은이들이 기존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윗 세대에 대한 존중을 표하기를 바랐다. 본래 흔하게 관찰되는 조직 내부에서의 긴장 정도에 해당했던 세대 갈등이 하나의 거대한 담론이 되어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후판단편향은 어떻게, 어디에 사느냐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도 영향을 준다. … 높은 주택 보유율과 이것이 가져다준 부 등 나이 든 세대의 행운은 지금 와서는 필연적 결과로 보인다. 실은 나이 든 세대도 그것을 전혀 쉽게 얻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이후 세대들에 비해 특별히 행운아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지 않는다.
(위의 책, 2장 '주거: 내 집 마련의 꿈과 멀어지다' 중에서)


  상대에 대한 이해보다 자기주장을 피력하려는 의욕이 앞서면서, 세대 담론이 이내 어디에서나 작은 스파크로 대형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불씨가 되어버렸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격앙된 감정을 집단적으로 절제하고 의견을 정제해 공론장에 내놓는 것은 양측에 모두 쉽지 않았다.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 내면에 잠재된 불만이 표출되는 양상이었다.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시장에 편입된 영역은 어디든 제로섬, 승자독식의 시스템으로 변질되기 쉬워졌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치열한 경쟁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게임에서든 승자는 한정되어 있는 법이며, 시장에서의 패자를 보호할 사회적 안전망이 탄탄하지 않은 여건이 플레이어 다수의 불안의식을 자극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상시적 스트레스에 노출된 사람들은 화풀이의 대상이 생기면 십자포화를 퍼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정'을 대표적인 시대정신으로 내건 청년들에게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저년차의 젊은 직원이 그보다 업무 강도가 낮은 상사보다 훨씬 적은 급여를 받으며 일하는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반대로 조직의 핵심인 세대의 눈으로 보면, 아직 조직에 충분히 기여하지 않은 새파란 청년들이 이미 오래 공헌해 온 자신들이 중시하는 것과 다른 가치를 언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탐탁지 않다. 선명한 세대 간의 이해관계, 가치관 차이는 전쟁의 방아쇠를 당겨버린 소재였다.


나이가 들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vs
요즘 것들은 다 저렇게 사는 건가?

  많은 젊은이들이 관습적 사고방식을 가진 선배들을 보면서 그 세대를 통째로 구태의연한 집단으로 규정했고, 그들이 덕을 보고 있는 것들에는 기득권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중년층과 노년층은 청년들에게 미숙한 룰 브레이커라는 낙인을 찍었으며, 그들을 가리키는 표현인 MZ라는 말에 경멸을 표하기도 했다. 일단 시작된 다툼은 우리 뇌의 본능을 거쳐 그 전선을 무차별적으로 확장해 갔다. 수많은 특성의 사람들이 결집한 '세대'에 편협한 프레임을 덧씌워 범주화하고, 근거가 빈약한 생각들을 상대 진영으로 퍼부어 댄 것이다.


  글쓴이를 포함한 청년 세대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1인당 GDP 1만 달러 이하의 국가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베이비붐 세대와 X세대는 황폐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평범한 삶'의 기준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며, 지금 청년들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기반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물론 그들이 고도성장기에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취업시장의 덕을 보았고, 최근 폭등한 자산시장에서 수혜를 입은 층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구조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며, 자식뻘인 청년들이 힘들기를 바란 것 또한 분명 아닐 것이다.


  기성세대도 저성장 시대에 노동시장이 보여주는 각박함이 어떤 수준인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의 청년 세대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연령층이며, 그로 인해 가장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사회에 진입해야 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청년 세대가 기성세대보다 더 나은 여건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맞지만, 그들은 더 앞에서 출발하는 대신 더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찬 채로 레이스를 소화해야 한다. 조건이 다른 만큼 다른 룰의 적용을 바라는 청년들이 당돌해 보일 순 있겠으나, 그 요구도 나름의 합당한 근거를 갖춘 것이다.


  


저출산의 충격도 가시화된다. 압권은 생산가능인구의 하락이다. 2018년 최초로 줄어든 이래 낙폭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 아직은 버티지만 2020년 0.84명이라는 출산율을 보면 20~30년 후엔 인력 부족이 본격화될 것이다. 참고로 20년 후 스무 살이 되는 2020년 출생자는 27만 2,000명뿐이다.
(전영수 著 『2022-2027 대한민국 인구 트렌드』, 블랙피쉬, part 1 '인구 절벽이 코앞까지 왔다' 중에서)


  사람들은 현상의 인과를 모두 살펴보기보다, 결과만 놓고 원인을 역산하려는 편한 사고방식에 빠지기 쉽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뇌가 편리함을 우선하는 회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대상을 관찰한 뒤 유사한 특성을 가진 집단을 카테고리로 만들어 통일적 특성을 부여하려는 습성과, 현상에 결과론적인 해석을 곁들이도록 유도하는 무의식이 그 예시이다.


우리 모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뇌 속의 편의적 관성에 조금씩 이끌린다

  기성세대는 아무리 세상살이가 어렵다고 해도 젊은이들이 이렇게까지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청년들은 심각한 학력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늦어지는 사회 진출과 차가운 노동시장, 감당하기 어려운 물가로 인한 자산 축적의 어려움으로 결혼조차 어려워진 현실에 공감하지 못하는 윗 세대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혼과 내 집 마련이 출산의 필요조건 취급을 받는 사회 여건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청년층의 출산율이 반등하지 못하는 것은 필연이다.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내려진 판단이 중첩된 결과다.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왜 낡은 사고방식에 집착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청년층과 다른 인생의 궤적으로 살아온 그들이 지금의 청년층과 다른 가치관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을 가진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사고방식이 당연하게 통용되는 시대를 거쳐 왔으며, 나이를 이미 충분히 먹었기 때문에 언행에서 갑자기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 근거를 쉽게 찾기 어렵다. 해왔던 대로 해나가는 것이 최적의 방식이라고 경험으로 습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예전에 적합한 것과 지금 적합한 것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것뿐이다.


시대적 특성으로 정의될 정도로 광범위한 사회 현상이 나타나는 데에는
분명히 합당한 이유가 있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여러 세대는 성장기와 청년기에 각각 다른 환경에 노출되었고, 그 제약조건에 대해 나름대로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살아간 끝에 세대 차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세대에 속해 있든 상관없이, '우리'는 다른 세대에 비해 특별히 더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DNA를 타고난 게 아니다. 청년세대는 중장년 세대의 피를 이어받은 세대이지 않은가? 세대를 그룹화해서 어떤 특성을 가졌다고 폄하한다면, 자신도 그 피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각기 다른 세대는 각기 다른 고충을 안고 있다. 청년들이 눈앞에 놓인 취업의 높은 벽과 오르지 않는 실질임금에 머리를 싸매고 있고, 중장년들은 오랫동안 자식이 경쟁 속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갈수록 길어지는 은퇴 후의 삶을 생각해야 한다. 서로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면서 소모적인 논쟁을 과열시키는 것은 결론을 내지도 못하고 시간만 축내는 행위이다. 사회에서 경험하는 서로 다른 특성의 고통을 계량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답을 낼 수 없는 주제로 토론을 지속하는 행위는 결코 생산적이지 않다.


  한국이 저성장 시대로 돌입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그룹에 속해 있든 대체로 잘해 봐야 제로섬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제로섬 상황에서는 현재,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유혹이 가장 강하게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도처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무언가를 배워도 사람은 결정적일 때 단기적 이익에 이끌리기 쉽다. 세대 갈등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작금의 현실에서 오늘 나의 몫을 취하려는 방식은, 현재의 상대 혹은 내일의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판단이 되기 쉽다. 그리고 일방의 희생으로 자신이 이득을 누리는 방식에는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무거운 대가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저성장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양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잘 보이진 않지만, 공멸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날 열쇠는 우리의 머릿속 어딘가에 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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