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움과 비움

by 틈새


생일날 아침입니다. 맑고 투명한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흰 구름과 창가에 와서 고운 소리로 지저귀는 새가 생일을 축하해 줍니다. 주방에 들어가 미역국을 끓이는 대신 안방에 들어와 옷장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출근할 때 즐겨 입던 옷들이 주인과 함께 퇴직을 한 채, 옷걸이에 걸려 축 늘어져 있습니다. 딱 내 모습 같습니다.


선물 받은 스카프, 첫째가 사 준 핸드백, 둘째가 틈틈이 사 들고 온 모자들도 주인의 무관심에 지쳤는지 선반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있습니다. 한때 아끼고 좋아했던, 그리고 의미 있고 사연 있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기를 잃은 채 옷방에 갇혀 주인의 충복처럼 함께 늙어가고 있습니다. 퇴직한 후 특별히 하는 일이 없고 다시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탓에 외출도 줄이는 날들입니다. 특별히 옷을 갖춰 입고 외출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하루에 한 번 강변길 산책할 때 입는 옷이야 가볍고 편하면 그만입니다.


생명이 있는 물건들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했고 내게 길들여진 친구들입니다. 씨줄과 날줄 사이사이 나의 체온이 배어있고 손때가 묻어있습니다. 낡고 닳은 소매 끝은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의 기록입니다. 내가 기뻤던 순간의 즐거움을 함께 알고 있고 마음 아팠던 오후의 쓸쓸함도 다 기억하고 있는 분신 같은 아이들입니다.


빈 상자를 펼쳐놓고 헤어질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합니다. 앞으로 사용할 것 같지 않은 물건들 중에서 정표로 곁에 두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버릴까? 남겨 둘까? 순간의 갈등에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와 함께해 주어서 고마웠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내 마음에 쏙 들었어.”


마지막 인사를 하며 상자에 담습니다. 쓰지 않은 액세서리들도 골라 담습니다. 정리하고 나니 옷장이 넓어졌습니다. 옷장만이 아닙니다. 내 마음도 환하게 넓어집니다.


채움으로 행복했다면 비움으로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가벼워짐은 옷장을 비우는 일만이 아닐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일, 생각을 비우는 일, 사랑과 미움을 비워내는 일 또한 필요합니다. 어쩌면 낡은 옷을 비워내는 일보다 더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채움이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늘 지적 갈증을 느끼며 채워 넣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비우는 일을 잘하고 싶습니다. 비우면 늘 산뜻합니다. 채움이 필요할 때 더 신중해집니다. 떠나보낼 줄 알고 새로 맞이하는 일에도 능숙해집니다. 자신을 변화시킬 줄 알고 집착하는 일로부터 쉽게 탈출하기도 합니다. 비워졌을 때 다른 곳을 살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비움으로 더욱 새로워지는 날들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