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사회학?
쿄코. 내 첫 번째 이름이다. 전산화가 되기 전 떼었던 호적등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 출생 신고가 5년 늦은 사유를 적은 것인데 나는 여기서 내 이름의 유래를 짐작했다. 서울 경(京) 자를 쓰는 내 이름. 근데 나는 오사카에서 태어났는데?
내 부모는 제주에서 일본으로의 밀항의 절정기였던 1960년에서 197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불법체류자였다. 네이버로 찾은 재일제주인 자료(“제주인 도항자들은 주로 오사카 공장지대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돈을 벌어 귀향하였다.”)에서 언급된 것처럼 아버지, 어머니도 오사카에서 일했다. 근데 나는 도쿄 태생으로 되어 있다. 이게 뭐지? 궁금했지만 물어본 적은 없다. 이런 의문을 품고 나름 논리적으로 생각할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입 닫고 귀 막고 눈 감는 태도가 여자가 갖춰야 할 겸양이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듬뿍 흡수한 상태였다. 이를 어겼을 때 돌아올 핀잔과 빈정거림이 무서워 입 밖에 내지 않았고 그저 서울(도쿄도 일본의 서울이니까)에서 얻은 아이이니 쿄코라고 했겠거니 여겼다. 대학 4학년 겨울 방학 때 내 이름을 지어졌다는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부모님은 일본의 6개월짜리 관광비자(이런 비자를 받으려면 일본인의 보증이 필요한데 아버지의 동생이 해주었다. 오사카에는 일본에 귀화한 나의 작은아버지가 산다.)로 머물며 돈을 벌고 있었다. 나는 15일짜리 관광비자(이는 보증이 필요 없었다.)로 부모님께 갔었는데 그때 그를 보았다. “내가 네 이름 지어 줬는데, 알고 있냐?” 그 사람은 활짝 얼굴을 펴며 말했다. 얼굴이 폈다는 말이 정확한 게 무표정일 때 그의 얼굴을 점령했던 주름이 쫙 펴졌기 때문이다. 그런 표정은 내게 친밀감을 표현하는 듯 보였는데 마치 내가 여태 명줄을 부지한 게 자신이 붙인 이름 덕인 양 구는 태도였다. 그는 어머니의 사촌 고모의 남편이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날, 정확히는 다섯 번째도 딸이라는 걸 확인하고 낙담한 날, 그는 아버지를 위로하며 이름은 자신이 지어 주겠다고 했으리라. 이름값은 안 받겠다고 하면서.
그전까지 아버지가 타향에서 얻은 나에게 희망을 품었다는 의미로 애정과 기대를 담아 내 이름을 지었다고 상상했었다. 언니들 이름에 쓰는 사랑 자(慈)가 아닌 아들 자(子)를 쓴다는 것도 이런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다. 1970년대 초반생 여자에게 흔한 자로 끝나는 이름임에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함을 덧씌웠었다. 지금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아니라 착각이 되었지만.
내 이름이 촌스럽다는 것은 수도원에 들어와서 알았다. 그전에 이를 느꼈지만 내 앞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없었다. 수도원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했다.
내 수련 동기들은 12명이었는데 전국, 아니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제주 출신인 나를 포함해서 진도, 광주, 부산, 울산, 충청북도, 경기도 의정부, 서울(셋), 중국 조선족(둘) 출신이었고 나이 차이도 띠동갑을 넘어 14년 차이였다. 그러니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수련을 받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동생 그룹에 속하는 이들 몇 명(그 당시 25, 26살이었던 이들)이 언니 그룹에 속한 나와 윤심의 이름을 놀렸다. 웃으며 농담조로 가볍게. 불쾌한 티를 내면 어색한 분위기가 될 게 뻔했다. 화를 내는 대신 윤심은 집에서는 영애로 불린다고 알렸다. 아버지가 영애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출생 신고를 하러 면사무소에 갔더니 면서기가 영애는 어렵다며 윤심으로 호적에 올렸다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웃겼다. “면서~기.” ‘면’을 강조하고 ‘서’를 길게 늘여 발음하면서. 나는 쿄코라는 일본 이름이 그대로 옮겨진 경자였다. 사연도 뭣도 없는 경자. 나는 화가 나고 부끄럽고 당황스러운 감정을 그녀가 불러일으킨 웃음 속에 숨겼다.
그래서 수도명에 욕심을 부렸다. 착복(수련기에 접어들면 정식 수녀와 같은 복장을 하게 된다.)하면서 받는 수도명이 특별하고 유일했으면 싶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수도명을 찾아 헤매다가 ‘케이샤(Kaishar)’를 골랐다. 케이샤라는 이탈리아 사람의 신앙생활 중에 본받고 싶은 점을 적어내며 수도명을 청했는데 거절당했다.
이제는 이름으로 불릴 일이 거의 없어 어쩌다 이름이 들리면 흠칫 놀란다. 특히 성을 떼고 이름만 불리면 ‘저게 나를 부르는 소리라고?’ 하며 낯설어한다. 30대에 접어들어 처음으로 아줌마라고 불렸을 때처럼. 내 이름에 실린 유약하고 볼품없고 초라하고 촌스럽고 무식한 이미지에 ‘이게 뭘까?’ 싶다. 이 이미지에 대항할까, 침몰할까 저울질하기도 한다. 대항의 방법으로 한 번 더 이름을 바꿔볼까? 개명신청 방법을 알아봤다. 인터넷으로 전자 소송을 거치는 방법은 쉬워 보였다. 하지만 개명 후 신분증, 여권, 각종 보험, 통장, 자격증과 졸업증, 학위증, 그 외 내 명의의 여타 소유물에 바뀐 이름으로 달아놓을 일이 꽤 귀찮다. 이 이름을 달고 살아오는 동안 내게 이야기가 생겼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졌고 자동차를 두 번 바꿨다. 뭔가를 사고 소유하고 잃어버리기도 했다. 모든 데 이 이름이 들어있다.
이름은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내 안에는 특별하다고 인정받고픈 욕망이 자리 잡았다. 이는 기다리던 아들이 아니라 윗목으로 내쳐진 존재(이는 내 에피소드는 아니다. 나는 다다미가 깔린 일본집에서 태어났다.)가 아니라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환영받고픈 마음이다. 이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의 인정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