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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카피 Jan 28. 2024

퇴직임원이 직접 차린 밥상을 받아보니

화승의 최초 여성 임원의 집들이  후기

10대 후반에 입사해 60줄이 되어서야 화승을 떠났다. 나이키 신발 OEM으로 재계 서열 22위에 오를 만큼 전성기였던 화승의 신발 전성시대, 동양고무의 재봉 여공으로 입사해 화승의 첫 여성 임원이면서 초고속 승진에 전무라는 타이틀까지 꿰찼던 그녀였다. 오랜 회사 생활 중에서도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해외에서 신발 하나에 바쳐온 인생이었다. 여성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그녀는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2015년 베트남에서 근무하던 그녀의 모습

앞이 창창한 후배들을 위해서기이기도 했고 그간 함께하지 못했던 아픈 남편을 위해서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그동안 가장 사랑해야 할 자신을 이제는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평생을 그렇게 일만 하던 사람이 퇴직하면 대체 뭘 할까. 상실감이 크지는 않을까. 커리어를 위한 공허함이 상당할 텐데? 다른 회사에 가려는 걸까? 수많은 호기심들이 난무했지만 그녀는 지금 노느라 24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입술이 부르터있었다. 퇴직 후 할 게 너무 많아서 24시간도 모자랄 판이란다. 운전을 배워 차도 몰아야 하고 주말이면 만나지 못했던 분들과 골프도 해야 하고 해외여행도 다녀야 한단다. 남을 배려하느라 정작 자신을 위한 투자엔 인색했을 그녀라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위해 부지런히 행복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던 그때였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언제 그랬냐는 듯 훌쩍 지나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열심히 잘 놀고 있다. 집에 상주하던 간병인이 사정이 있어 나오지 못해 그녀가 직접 남편을 간병하며 직접 집안 살림을 한다. 매일 에어로빅과 필라테스를 하며 주말엔 골프를, 틈틈이 바다가 보이는 집 앞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꿈꿨던 미래를 오늘의 삶으로 누리고 있다. 여전히 심심할 틈이 없고 하루하루를 꽉 채워 살고 있다.

사두었던 아파트가 재건축이 되어 전세를 주던 그곳으로 입주를 했고 가끔 했던 주식 투자도 나쁘지 않았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있는 만큼만 쓰면서 나누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녀의 인생에 이런 찬란한 휴식의 호황기가 올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인생이었다. 돌아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게 되었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지! 그래서 그녀는 더 건강해졌다.

그런 그녀의 집들이 초대를 받았다. 퇴근 후 와인 한 병을 챙겨 그곳으로 향했다. 배달 음식 맛있게 먹고 맥주 한잔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운대 바다가 환히 펼쳐진 거실로 들어서자 커다란 상에 예쁘게 플레이팅 된 음식들이 놓여있다. 배달 음식을 예쁘게도 담으셨네 했더니 모든 음식을 손수 만들어 차렸단다. 오전부터 장을 봐서 하나하나 주방에서 직접 만들어 차린 상. 퇴직임원이 직접 차린 상을 받아보니 그만 울컥 감격이 밀려왔다.

곳곳의 퇴직임원에 대한 글을 보면 조금은 우울한 면모가 없지 않은 요즘이다. 그래서 오늘 받은 이 맛있는 상은 퇴직임원인 그녀의 삶이 더욱 향기롭고 맛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고마운 상이다. 소스가 특히 기가 막히게 맛있는 오향장육, 짜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맛있는 등뼈 김치찜, 손이 많이 가기로 유명한 야채 무말이(겨자 소스가 진짜 예술!), 맛살두부 하트전, 그리고 샐러드 2종까지. 이날의 이 밥상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바로 채접국이었다. 살짝 매콤하면서도 당면이 어우러져 국이기보다 하나의 요리에 가까운 메뉴가 되었던 재첩국.

혼자 독서를 즐기는 그녀만의 시간

퇴직하고 꼭 무얼 해야 한다는 강박, 타인이 어떻게 자신을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불안을 떨칠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선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이 최우선이겠지만 그 경제적인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고 그동안 고생한 자신에게 상을 줄 수 있는 조금의 여유가 있다면, 그게 바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그렇게 오래 자신을 써먹었으면 이제는 좀 쉬게 해 주어도 된다.라는 마음으로 내일 출근 준비를 한다. 나도 언젠가 맞을 그때, 어떤 모습으로 마주할지 미리 상상해 보는 어느 일요일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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