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편지
멀리 있지만 항상 곁을 지키는 그대에게
보름이 넘게 비소식이 없었어요.
논에는 모터를 돌려서 물대기를 해주고 있지만 밭농사는 여전히 하늘에 기대어 짓고 있어요.
새벽은 시원하지만 막내아이와 아버지의 아침밥이 우선이라 밭에 나설 수가 없어요.
더하여 한낮에는 따가운 땡볕이 내려쬐는 터라 마당앞도 천리길이고요.
이런 저런 이유로 저녁 6시 즈음 저녁 해가 뒷산으로 꼴깍 넘어갈 때를 기다렸다가 밭으로 향하기 마련이에요.
부엌 창 너머로 흘깃 흘깃 붉은 햇덩어리를 건너다 보는 것은 흔한 일과에요.
어린왕자는 해지는 풍경을 의자를 놓고 그렇게 즐겨 보았다는 데 농사꾼은 해지면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가야 하거든요.
어느 슬픈 날엔 어린왕자는 마흔 세번이나 황혼을 들여다봐야 했다고 하고요.
어린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그랬을까 홀로 상상의 자유를 누려보기도 하였어요.
하루 한번 해거름에 맞춰 헤아려 보지 않았지만 백여번 호미질을 했을 것 같아요.
물론 그 사이에 아버지와 막내아이 저녁밥을 차려주고, 맨 아래 밥그릇인 누렁이와 고양이까지도 살뜰히 챙겨놓아야 했고요.
엄마는 동네회관에서 저녁까지 잡숫고 오시니 그나마 간단한 부엌일이어요.
대략 열명의 할머니들이 모여서 함께 밥짓고 반찬을 만들어서 잡수시면 집밥보다 더 맛있다는 말씀을 종종 하셔요.
인사차 무얼 잡수셨나 여쭈어 보면 한결같은 대답이 들려와요.
"잉, 동네 회관에 가믄 뭐고 더 맛난디!"
엄마가 여럿이 어울려 놀고 밥까지 지어먹는 재미를 한껏 누리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요.
평생 농사꾼 엄마와 둘이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밭일을 나갔어요.
엄마는 논둑 사이와 밭둑사이에 빈 공간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시니 검은 콩 모종을 심어볼 참이에요.
전에는 엄마의 그 지독한 농사꾼의 모습이 징글징글하여서 뜯어말리기도 하였어요.
"엄마, 콩을 심어서 무엇해요? 그걸 심어서 무슨 보람이 있다고요?"
한데 올해엔 아버지가 특히 콩죽에 콩시루떡, 콩국수 등등 콩으로 만든 음식을 즐겨 잡숫고 계셔요.
밖에서 사와도 그만이지만 농사짓는 것보단 못미더운지라 엄마를 도와 콩모종을 심기로 하였어요.
콩모종을 직접 키워놓은 널따란 모종판을 들고 논둑과 밭둑, 둘레길을 향하였어요.
물뿌리개에 가득 물을 채워 가져다 놓는 것까지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워낙에 가물어서 바짝 마를 대로 마른 흙.
날카로운 호미끝으로 있는 힘껏 내려쳐 보았어요.
웬걸, 딱딱하게 다져진 흙바닥이라서 흙은 좀처럼 쉽게 파지지 않았어요.
하얀 먼지만 풀풀 날리는 데 처음 몇 번은 어이가 없어 그만 멍한 웃음이 터질 뻔 하였어요.
슬그머니 오기가 올라와서 호미를 연신 내려찍으면서 뭐야 뭐야를 읊조리기도 하였어요.
"뭐야? 이래도 안 될래?
그야말로 물기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황량하고 건조한 땅, 논두렁 밭두렁이었어요.
호미로 파낸 고랑에 검정콩 모종을 하나씩 앉혀놓았어요.
하얀색 콩뿌리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땅위에 놓아야만 했어요.
그 다음에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콩모종이 물을 흠뻑 뿌리고 파낸 흙을 다시 덮어주었어요.
이때 멋모르고 손에 힘을 주고 꼭꼭 눌러줄 필요는 없어요.
바람이 들어가 콩 뿌리가 마르지 않을 정도로만 흙으로 새는 구멍만 메꿔주면 되는 일이에요.
어렵지 않은 일, 엄마와 둘이서 검정콩 한 판으로 모두 논과 밭 둑 사잇길을 채워두었어요.
초여름 유월에 심어두고 추석이 지나고 서리가 내릴 즈음에 늦은 수확을 하는 콩농사에요.
세발 고양이가 밭까지 졸졸 따라오더니 밭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밭고랑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함께 하였어요.
"왜? 너 먼저 집에 가라니까~"
아무리 고양이에게 집으로 가라고 몇번이고 이야기를 해봐도 도무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일하다 말고 흘깃 뒤돌아보니 한 발로 어렵사리 딱딱한 흙을 파내고 똥을 한무더기 싸놓기까지 하였고요.
그 모습을 바라보니 왠지 처량한 마음이 들어서 늘어놓던 잔소리를 슬그머니 접었어요.
결국 엄마와 고양이까지 셋.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어느덧 한 시간 남짓 시간이 흘러갔어요.
여름 밤 더딘 어둠은 아직 늦장을 부리는지 집주위에 얼씬거리지도 않았고요.
"니가 도와주니께 밭일 한것도 아닌 것 같어야."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콩 농사를 짓는 엄마에요.
별스럽게 큰 도움이 되었으랴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니 어설프게나마 도움이 되었나봐요.
지붕을 두드리는 빗물소리를 자장자처럼 들으며 하늘에 기대어 살아요.
처마밑에 동그란 빗방울의 발자국 깊어요.
진심에 진심으로.
다음 주 토요일, 제 편지를 오늘처럼 기다려 주실 테지요.
나와 그대의 5 퍼센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