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
말할 수 없는 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어요.
며칠 전, 엄마와 함께 보건소 앞마당 주차장에 들어설 때였어요.
참새보다도 자그만한 새 한마리가 자동차가 들어설 바로 그 자리에 살포시 날아 앉는 거였어요.
간혹 도로에서 자동차에 치여서 무방비상태로 널부러진 동물의 사체를 볼 적마다 섬뜩섬뜩 한 지라 어쩌지 못하고 그냥 핸들만 붙잡고 있었어요.
5 퍼센트, 자작시☆
날개와 몸통의 색깔까지도 아침마다 만나는 참새와는 완판 다른 모습이라 더욱 새로이 보였던 것 같아요.
훅 불면 날아갈 듯이 가녀린 몸피, 더군다나 그 조그만 부리에는 아주 작은 나뭇가지를 물고 있었어요.
네모 반듯한 보도 블럭 위를 용수철을 단 것처럼 종종종 바람처럼 가벼이 걸어가는 것이었어요.
날아가는게 아니라 걸어가는 작은 새.
분명히 걸어가는 모양새를 보면서도 하도 가벼워서 얼핏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어요.
"어디 가니?"
나도 모르게 속엣말이 슬그머니 흘러나왔어요.
작은 새가 말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자동차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날아가듯이 걷던 발걸음을 멈추더니 앉은 자리에서 후드득 날개를 펴고는 멀리 멀리 날아가버렸어요.
새가 비워준 자리에 가뿐한 마음으로 자동차를 들일 수 있었어요.
새와 사람이 나누어 가졌던 그 자리에서요.
무거운 자동차와 작은 새는 보이지 않지만 같은 자리에 두가지 발바닥을 새겼을테지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말없는 말로 작은 새는 말해주었어요.
'새와 사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야'
소리없는 말이 새가 떠나간 자리에 메아리처럼 바람결에 흘러들어왔어요.
너무 짧은 만남이라 사진을 찍어놓을 만한 짬조차 낼 수 없었어요.
그 새의 이름을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도 안타까웠어요.
여태 무엇을 하고 살았는 지 그러고도 시골사람이 맞는 지 스스로 의아해 하기도 하였어요.
다시 만나면 한 눈에 알아볼 것 같은 데 말이지요.
'어! 너, 보건소 앞 주차장에서 만났잖아."
뻘쭘하게 혼자만 반가워할 지도 모르겠지만요.
이름을 알 수 없지 못하니 여간 답답하지 않네요.
듀엣곡, 청하와 크리스토퍼의 'When I Get Old'를 함께 올려보아요.
흥겨운 멜로디와 두 사람의 어울림이 보기 좋아서 즐겨 듣고 있어요.
글쓰기를 하면서 무식한 줄 모르던 지나온 살아왔던 날들이 깨지고 있어요.
위의 사진에 올린 것처럼 '쥐똥나무'
이름과 달리 아주 아주 진하고 매혹적인 향기를 품은 나무예요.
(열매가 까만 쥐똥과 닮아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는 데 향기에 깜짝 놀란 터라 쥐똥 나무에게 미안한 이름이구나 하였어요)
쥐도 만나기 어렵고 쥐똥은 더욱 깜깜한 이들이 많은 요즘 세상이지요.
(쥐도 만나고 싶지 않은 동물이기도 하고요)
꼬맹이 시절, 까맣고 길쭉한 쥐똥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어요.
말하자면,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락을 저장해놓은 창고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는 통에 보지 않을 수 가 없었던 거예요.
어린 마음에 살금살금 몰래 쥐가 들어와 실컷 나락을 훔쳐먹고 그자리에서 똥을 싸놓고 간다는게 아주 괘심해 보였고요.
부모님이 정성껏 키운 나락을 훔쳐먹었으면 적어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똥을 싸는게 양심적인게 아닌가 하였거든요.
하긴 쥐의 입장에선 가당찮은 소리겠지만요.
기왕이면 깊고 아름다운 향기에 걸맞는 어여쁜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쥐똥나무는 언제나 가로수길에 서 있었는데 이제야 그 이름을 알아본 게 얼마나 어이가 없는 일인지.
앞으로도 글쓰면서 어제 감은 눈을 조금씩 뜨면서 살아가겠지요.
진심에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