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비해 전쟁의 위험이 줄어든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벙커에 들어간다는 경험을 하는 것은 민간인의 신분에서 어려운 일입 겁니다. 하지만 지난 2005년 여의도 환승센터 건립을 위한 현장 조사 중에 발굴된 SeMA벙커는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 증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현재 예술 공간으로써 우리가 벙커를 경험함과 동시에 예술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차가운 녹색 기지》는 여의도 한복판에서 벙커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신진예술가를 소개하는 전시 프로젝트에 선정된 송아리 작가의 전시입니다. 작가는 어두운 지하 속에 있는 전시 공간을 '심해' 속이라 상상하며 전시의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작가는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존재들이 만나 발생하는 '변이'를 탐구해 왔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심해 속 생명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탐구하고 상상하는 전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차가운 녹색 동물>이라는 작품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사로잡습니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탄생한 심해 속 식물들 전시장 곳곳에서 반짝이며 존재합니다. 마치 심해 환경을 찍은 사진 속 미스테리한 생명들을 모아 박제해 둔 듯합니다. 이 작품들이 만들어진 과정이 매우 독특한데요. 작가는 해수를 채취해 얼린 후 테이프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후 물이 사라지면서 테이프 안에 남은 수많은 물의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우리가 생물을 탐구하기 위해 현미경으로 올리기 위한 과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얇은 껍질 속에 남은 자국들을 하나씩 뜯어보면서 바닷속 생명체들이 살아남기 위해 움직이고 남긴 부산물들과 이것을 보기 위해 움직인 작가가 남긴 행동들의 흔적들이 모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낸 듯합니다.
주말에 방문한다면 송아리 작가와 이민진 무용가가 펼치는 퍼포먼스 <차가운 녹색 식물>(2022)를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바닷속에 머리끝까지 담근다면 들릴 내 몸이 울리는 듯한 소리, 주변을 가득 채운 물소리, 깊은 바닷속을 헤엄치는 고래 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들이 나를 좀 더 깊은 바닷속으로 이끌어냅니다. 사실 우리에게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 존재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속도로 본능을 쫓은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하루 종일 찍은 식물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배속으로 보여주는 듯한 이 퍼포먼스에서 심해 식물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얼마나 생존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일지 상상하게 해 줍니다. 퍼포머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상 역시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거대한 해초 덩어리 같기도 하고 해파리 같기도 한 이 옷들은 심해 식물에 대한 작가의 넘치는 상상력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전시는 저에게도 특별한 전시입니다. 송아리 작가와 함께 전시 서문을 작성했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을 방문하시는 많은 분들이 작품에 더 즐겁게 다가가고 새로운 경험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성한 전시 서문이 관람에 좋은 길잡이가 되길 바랍니다.벙커라는 공간적 특성상 많은 전시를 진행하지 않는 이곳에서 《차가운 녹색 기지》는 특별한 공간적 경험과 예술 경험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몇 없는 기회일 겁니다. 더위가 조금씩 사라지는 요즘 여의도 지하에서 송아리 작가의 특별한 심해에 빠져 보시길 바랍니다.
전시 제목 - 차가운 녹색 기지
전시 위치 - SeMA 벙커 B1 전시실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대로 지하 76)
전시 날짜 - 2022.08.17 ~ 2022.09.04 (화-일 오전 11시 - 오후 7시, 매주 월요일 휴관)
전시 문의 - (02) 2124 - 8942
전시 연계 프로그램 - 송아리 작가, 이민진 무용가의 퍼포먼스 <차가운 녹색 식물>(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