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초등학교 4~5학년 때이었던 것 같다. 엄마한테 혼나고 갑자기 너무 억울해서 원고지에 글을 몇 장이나 썼었다. 일기장에 막 쓴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글쓰기 숙제를 내서 쓴 것도 아니다. 왜 내가 글을 썼는지 그것도 원고지에 썼었는지 그 기억을 한번 떠올려보고 싶다.
어릴 적 엄마는 웬만하면 자녀들을 혼내지 않았다. 자녀들이 많다 보니 아마도 한번 혼내기 시작하면 감당이 안되었기 때문일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가급적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알아서 숙제하고, 공부도 하고, 반찬 투정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엄마의 잔소리를 거의 들은 적이 없다.
그런 엄마가 딱 한번 혼낸 적이 있다. 학교를 가지 않은 것을 보니 일요일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늦잠을 잤다. 얼마나 늦게까지 잤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늦잠 잔다고 혼났으니 꽤 늦었던 것 같다.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엄마가 불을 때던 부지깽이를 들고 들어와 엉덩이를 딱 한번 때렸다. "빨리 안 일어나?" 이게 다였다.
너무 억울했다. 아니 늦잠 잔다고 부지깽이까지 들고 오실 일인가? 속상한 마음에 밥도 안 먹고 바로 건넌방에 가서 원고지를 펼쳤다. 원고지에 나의 억울함을 최대한 자세히 그리고 논리적으로 써 내려갔다. 억울함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고, 엄마를 못된 계모처럼 표현했다. 원고지를 선택한 이유는 최대한 웅변 원고처럼 호소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 열 장을 쓰고 나니 맘이 후련했다. 글을 쓰고 나서 원고지를 다시 읽어봤다. 무슨 독립선언문을 쓴 것처럼 결의에 찬 느낌이었다. 원고지에 또박또박 눌러서 쓴 글은 나의 억울함을 대신 표현 주고 나를 달래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원고지에 썼던 글의 힘은 참 신기했던 것 같다. 직접 엄마한테 대들지도 못하고, 억울하다고 말도 못 하고, 엉뚱한 원고지에다 호소했던 것이다. 내가 이런 감정이라고, 나를 좀 알아달라고, 그리고 억울하다고!
성인이 되어서는 아무리 기분이 나쁘고 안 풀리는 일이 있어도 술을 마시면 마셨지 글은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방법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금 글쓰기를 나의 또 다른 해우소(?)로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답답함도 원고지에 써보면 달래 질려나? 그런데 요즘도 원고지를 팔긴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