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갔었어』신경숙
한 해의 끝은 일부러 마치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레 정리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정리라는 것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시작을 불러오기도 하지요. 이번 달에는 고요함 속에서 이별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새로운 삶의 행복을 되새기게 하는 신경숙 작가의『아버지에게 갔었어』를 함께 나누어 보려 합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오랜 세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거리를 두고 살아온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입니다. 한국 전쟁을 겪은 후 묵묵히 삶을 버텨온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병원에 계신 동안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넷째 딸 헌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헌이는 몇 해전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아픔을 안고 있습니다. 그 상실을 계기로 수면장애로 힘들어하는 아버지의 고통을 다시 보게 되고 아버지를 돌보며 지내는 동안 잊고 있던 기억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궤짝 속에서 큰 오빠와 아버지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발견합니다. 감정표현에 서툴고 맞춤법도 엉성한 편지들이지만 그 속에는 말로는 다 전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진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더 바랄 거시 업따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업다
하늘 아래 니가 건강하면 그뿐이다
헌이는 둘째 오빠와 어머니를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을 듣게 됩니다. 또 한국전쟁을 함께 견뎌낸 아저씨와의 만남을 통해 아버지의 지난 생 조금씩 이해하게 되지요.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과묵했던 아버지는 “오래 슬퍼하지는 말아라”라고, “각자 그렇게 헤매다 가는 것이 세상” 이라며 그동안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말로 헌이의 상처를 어루만집니다.
소설 속 아버지는 모범적이지도, 완벽하지도 않았습니다. 외도와 침묵, 오해와 미움도 있었지만 그 모든 기억은 결국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누구나 완벽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남기려 애쓰는 순간, 그것이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살아가며 남기는 사랑의 흔적일 것입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늙고 쇠약해진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남길 말이 있다며 헌이에게 받아 적게 합니다.
어떤 일에 마음이 옹졸해져서 쓰기를 주저했던 말들이 메마른 아버지 입에서 풍부하게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아버지가 힘을 내서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 냈어야,라고.
그 말을 들으며 헌이는 아버지의 삶이 단지 고단함의 연속이 아니라 행복의 다른 얼굴이었음을 느낍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눈물의 결말이라기보다 슬픔 속에서도 따뜻함을, 상실 속에서도 행복을 전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되면서 찾아오는 안도와 평온의 결말이라는 것도요.
한 해의 끝에서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어 보는 것은 연하장을 받아 든 가족들처럼 내 삶의 시간을 조용히 정리하는 일과도 닮아 있습니다. 지난 시간의 무게를 내려놓고 남은 마음을 다독이는 일, 그것이야말로 올해의 마지막 인사가 아닐까요. 올해의 마지막 책으로 이 이야기를 고르면서 저는 큰 소리로 인사를 남기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저 작은 숨에서 헌이의 아버지의 마음처럼 이 문장 하나를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행복했고,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