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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재가 청년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리랜서 Diary

 최근 리플러스 재혁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햇수로 따지면 1박 2일이고 시간으로 따져도 근 10시간이 넘게 얘기 나눴던 것 같네요. 그 중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뭐냐는 질문이었어요.
내가 하고 있는 신선하고 재밌는 생각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택한 게 

1. 그럴듯한 궤변 - 
이렇게 독특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 강의력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도록

2. 블로그 꾸미기 - 
관심 갖는 이들이 찾아오는 정보의 창구 
+ 프로그램 의뢰 필요시 방문할 수 있도록

3. 독서 및 공부 - 
생각을 꾸준히 유연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러나, '블로그'를 통해 고급 정보를 써내는 건 독자 유입에 매우 약하다는 말과, 내 생각을 궁금하게 하기 앞서 일단 이용자가 원하는 부분을 공략해야 한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덧붙여 '이 상태로는 독자층의 증가는 없을 거'라는 전망까지 받았어요.
 어그로든, 다소 유치한 내용이든 전문가의 문턱을 낮추고 조금 더 대중적인 이미지로 다가가는 것이 솔루션이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에는 '와, 이거 재밌겠다.' 는 있지만, '와, 이걸 재밌어 하시겠다.' 는 고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건, '이 재밌는 걸 같이 보고 재밌어 해줘.' 이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개선이 필요했죠.

 들으면서 참 싫었습니다. 심리학을 이용해서 약을 팔고 싶지 않거든요. 그러나 피드백은 정확했습니다. 저는 이용자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부족했어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이유보단 '그래서 어떻게?' 에 초점을 맞춰서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나의 욕구 VS 대중의 욕구
 1. 세상 참 살기 좋다. VS 좆같은 헬조선

 제가 볼 때 세상은 참 살기 좋은 곳입니다. 가능성이 넘쳐나고, 꾸준히 좋은 방향으로 향해 가고 있어요. 그 원동력은 개인 차원에서 생각하기(사색), 넓혀가기(독서)이고 관계 차원에서 안부묻기(관심), 사랑하기(이해)이고 사회 차원에서 제 역할하기(성실), 바로알기(계몽) 입니다.
 제 모든 사색의 바탕은 이 착안에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제 컨텐츠는 정보 전달에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시사점을 주려 노력합니다. 강의를 듣고 도리어 생각할 거리가 많아져서 찝찝하다는 피드백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모두들 너무 지쳤습니다. 동기 없는 쥐어짜임으로 공부한 뇌는 불안을 동력으로 꾸역꾸역 활동하지만 항상 "이제 좀 쉬고 싶다고!"를 외칩니다.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똥을 다른 이에게 투척하는 이기적임과 탐욕은 내리 갈굼으로 이어져 모두를 분노시킵니다. 
 안심 없는 사회에서 다들 참 열심히 삽니다. 열심히 살다가 열심히 살기를 포기한 이들도 점점 많아집니다. 말 그대로 여긴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좆 같은 헬조선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살기 좋은 세상을 부르짖어봤자, 그건 먹히지 않습니다. 이들이 평화를 원치 않아서가 아니에요. 평화 전에 외치고픈 다양한 욕지꺼리가 있을 뿐이죠. 


 2.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VS 생각하기 피곤해.

 생각의 힘은 대단합니다. 삶에 진지하게 임하고 거기에서 시사점을 얻어 생각을 뻗어나간다면 어떨까요? 어른으로의 성장은 거기서 일어납니다. 단적으로 말해, 한 사회의 존망을 다루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구성원들이 얼마나 생각 하는가?' 입니다.

 그러나 모두들 너무 지쳤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뇌를 사용하는 작업입니다. 뇌는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그렇기에 쉴 때 쉬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뇌는 어떻게든 휴식을 취하려 바둥댑니다. 멍 때리고, 소모적인 일에 몰두하고, 무기력해지는 것 모두가 뇌가 충분히 휴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잠을 많이 자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정신적인 쫓김이 없는 상태에서 뇌는 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들 참 바빠요. 끊임 없이 움직여요. 할 거 참 많은 세상이다 싶습니다.

 컨텐츠를 소비하는 시간은 이동 간에, 또는 침대에 뒹굴거리면서 입니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만 배운 사람들이 쉬는 시간에 하는 건 '무언가를 하지 않기'가 아니라 '생각할 필요 없는 무언가를 하기'가 되었습니다. TV를 켜놓고 라면을 먹으면서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보고 있으면 라면이 맛있을까요? 그냥 처먹는 거죠 그건. 그러나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불안해합니다. 그런 방법은 배우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는 무언가를 합니다. 일상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끊임 없이 해야 불안해하지 않으면서도 쉴 수 있어요. 실상은 쉬지 못 하는 거지만요.


 3. 알고보면 복잡하다. VS 간단하고 명확하게 알려줘.

 컨텐츠는 소비적입니다. 커다란 질문과 간략한 대답을 원합니다. '이건 이래서 그래.' 라는 쉬운 대답이 설명할 수 있는 범주가 크면 클 수록 유익한 정보로 해석됩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철수와 영희가 싸운 사건에 대해 말해볼까요? 따질 건 많습니다. 철수와 영희의 관계는 어떤지? 철수가 평소 영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영희가 철수에게 화가 난 건 어떤 이유인지, 그 이유를 영희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그들의 다툼을 만든게 비단 그 둘만의 문제인지 등 따져볼 내용은 파도파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함은 바쁜 이에겐 '사족'이 됩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자면 누군가가 채근합니다. "아, 그래서 누가 이겼대?" 라고.

 그리고 화제는 그 결과를 통해 다시 한 번 재생산됩니다. 물론, 그 화제는 편협합니다. 사건에서 개인의 이야깃 거리만 발췌됩니다. 누군가에겐 여자와 무차별한 싸움을 벌인 철수의 비인간성이 되고, 누군가에겐 남녀가 싸우는 베스트 이유 TOP 10이 되고, 누군가에겐 철수 엄마가 바람을 피고 있대가 되어 퍼집니다. 일부에 대해 전체론적 설명을 하는 건 이래서 위험합니다. '카더라 통신'은 소모품이 아닌 눈덩이니까요.

이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타인의 입을 통해 대신 듣고 싶은 건, 
사랑과 감사가 아니다. 불만 표출과 위로이다. 

 2. 이는 넘치는 감성이 아닌 유머와 병맛일 수록 좋다.

 3. 컨텐츠는 보는 순간에 즐겁고, 보고 나면 날아가야 한다. 생각거리가 남으면 피곤하다.

 4. 복잡한 건 싫다. 
애매하고 어려운 걸 단순하고 쉽게 (정답을) 알려달라.


 즉, 나의 힘을 빼지 않는 일탈적 컨텐츠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선 B급 정서를 자극할 필요가 있습니다. 병신 같지만 재밌는 것을 원하는 거죠. 

 이를 참 잘 하는 게 유병재입니다. 작은 키, 허접해보이는 외관, 특출나지 않아 보이는 분위기 그렇지만 체제에 꿀리지 않고 불합리한 상황에 소신껏 목소리 높이는 그에게 청춘들은 열광합니다. 유병재씨가 이런 자신의 방향에 입힌 스타일은 '풍자'입니다. 해학입니다. 
 화 나는 일에 대신 소리 질러주지만 감성에 치우치지 않고, 도리어 상대방을 골립니다. 다소 진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희화화해서 모두 웃음으로 공감할 수 있게 해줍니다. 화낼만한 이야기를 웃긴 이야기로 바꿔버리는 힘. 그래서 화를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 풀 수 있게 함으로써 그는 힘든 일상에 기운을 줍니다. 
 그는 복잡한 얘기를 하지 않아요. 핵심만을 깊이 건드립니다. 

어찌 됐든 넌 나한테 잘못했음 엿 먹어라ㅇㅇ!

 그 결과는 열광입니다.

 정리한 내용 1, 3, 4는 저의 취지와 상당히 어긋납니다. 불만 표출과 위로는 그 후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용서가 있어야만 성장의 발판이 됩니다. 마구잡이 어그로는 결단코 사회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은 오래하면 할 수록 좋습니다. 이용되고 휘발되거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은 채 준대로 입어버리는 논리는 침몰시 그를 지켜주지 못 합니다. 선생이 해야 하는 건 예쁜 답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훌륭한 질문을 만들어내는 거죠. 학생들이 그에 대한 대답을 만들어낼 때 사회는 발전합니다. 이것은 시간적 효율이 매우 떨어지죠. 단기적으로 봤을 때요. 그래서 만들어지는 유형이 객관식과 암기입니다. 저는 이것들을 정말 싫어해요. 옳지 않다고 보거든요.

 결국 아무리 대중에게 나를 알리려고 해도 1, 3, 4번에 타협하는 순간 저는 제가 아니게 되어버립니다. 제 신념을 반하는 일이니까요. 그렇기에 제 접근은 유머와 병맛입니다. 물론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병맛과 전문성은 참 거리가 먼 개념이죠. 상담하는 전문가로써 갖고 있는 저의 품위를 잃지 않는 방향으로 병맛을 어떻게 요리할 지는 꾸준히 고민해야 하는 방향 같습니다. 병맛에서 유머는 절로 피어나겠죠.

 맛집, 연애, 성, 남녀 심리, 사회 부조리, 영화, 게임 등 접근 문턱이 낮은 아이템이 있습니다. 이를 이용한 컨텐츠가 양산되는 건 당연한 전개일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문턱이 낮은 아이템 속에서 어떤 병맛을 '어라? 병맛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 있을 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요. 하여튼 참 고민 많았던 주말이었습니다. 그래요. 저는 오늘도 흘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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