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는 착한 것인가? 착한 자들만이 복지를 구상해내고 실행해낼 수 있는가? 휠체어 사용자가 단차를 점프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도시가 경사로를 설치하도록 설득하는 것보다 더 이득인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장애인복지론을 수강했다. 사실 그동안 나의 세계에 장애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장애인들의 세상을 당연시하며 살아왔던 내가 처음으로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외국에서였다. 그들의 일상에는 장애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장애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비장애인의 세상은 장애인을 사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여 형성된 부자연스러운 산물이구나! 그런데 나의 깨달음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좀 달랐다.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데? 그런 생각까지 하다니 너 참 착하구나-
내가 평소에 사회복지학을 복수전공한다고, 장애인복지론 수업을 듣는다고 하면 보통의 반응은 ‘내’가 착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이 참 싫었다. ‘착하다’는 말은 곧 내가 희생하고 있다는 말이며 결국 이는 그들의 핑계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 혹은 시민 등 누군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착한 누군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규정지음으로써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공적으로는 국가의 의무를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고, 사적으로는 다양성을 포옹할 의무를 이행하고 있지 않은 이유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또한 장애인복지가 ‘착하다’는 것은 동시에 이것이 경제적 합리성에 반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익이 되지 않을 일을, 심지어는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실행할 정도로 착하다는 뜻이므로.
‘정상’의 테두리가 견고한 한국에서 장애인들은 ‘비정상’의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생산성이 떨어지는 인간.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인간. 그 연령대에 요구하는 모습을 따르지 않으며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을 따를 수 없는 인간. 그러나 저것은 거짓된 정상이다. 나는 사람을 어떤 특정한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서열화할 수 없다고, 그러므로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사람을 볼 때 그의 존재를 보지 않고 어떤 속성만을 부각하여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각된 속성-그것은 보통 장애 등 자신과 다른 ‘낯선’ 속성이다-은 다른 속성을 지워버린다.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속성으로 존재하게 된다.
처음에 나는 내가 ‘착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장애인복지를 경제적 합리성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렇지만 애초에 비장애인을 위해 설계된 세상에서 경제적 합리성을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으며 인간을 그런 경제적 잣대로 평가해서도 안 된다. 전후 빠른 속도로 성장했던 한국 사회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자 및 소수의 의견은 반영이 되지 못한 채 구성되었을 것이다. 다행이 이제는 그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설계 대상자가 아닌 사람을 뒤늦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비용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애초에 잘못된 설계 탓이지 이를 소외된 자들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동시에 이 추가 비용을 회피하거나 경제성을 따지며 현 상태를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복지는 착한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열린 마음이고 인간을 섣불리 분류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로 보는 접근이다. 그리고 국가는 마땅히 인간의 분류가 좁혀져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므로 장애인복지는 자선, 희생, 봉사 따위가 아니다. 절약할 수 있었던 추가 비용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인간이 사회 내에서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기 위해 당연히 이행되어야 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다. 복지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와 그 구성원의 기본적 가치이자 의무이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