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아들

아이러니 속 인간의 존엄성

by 욘욘

아이러니: 상식이 상식이 될 수 없는


<사울의 아들>은 굉장히 아이러니한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세계인 아우슈비츠 또한 굉장히 아이러니한 공간이다. ‘존더코만도’라 불리는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을 죽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죄책감을 찾을 수 없다. 표정이 없는 그들은 그들이 부르는 대로 시체를 정말 ‘토막’ 다루듯 하며 죽음에 무감각하다. 숨 막히는 아우슈비츠에서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사치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다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책임지기에도 버겁다. 오프닝 타이틀이 나오기 전, 강렬한 샤워실의 비명소리는 여기 아우슈비츠가 그런 상식이 통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는 듯하다.

그런데 사울은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갑자기 누군가의 죽음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눈앞에서 한 생명-그것도 어린 생명이-이 죽는 모습-그것도 타인에 의해-을 본다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아우슈비츠이고, 따라서 사울의 반응은 이상한 것이다. 그 죽은 누군가가 사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객들은 그의 반응을 이해하게 된다. 이제 사울은 제대로 된 장례 의식에 집착한다. ‘랍비’가 ‘기도문’을 읽어주고 시신은 ‘땅’에 묻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라도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집착한다. 그렇게 아들을 위하는 과정에서 사울은 다른 작업장의 배교자, 그리스인 랍비를 희생시키고, 화약을 잃어버려 모든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한다. 사람들은 이런 사울을 비난한다. “죽은 자 때문에 산 자를 버리다니.” 그래도 관객들은 아직까지는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인 사울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가면 이 소년이 사울의 아들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게 된다. 그럼 지금까지의 희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관객들은 혼란에 빠진다. 그래도 좋다, 기왕 많은 이를 희생시켜 랍비를 데려왔으니 장례라도 무사히 치르자고 관객은 생각한다. 하지만 뒤이어 랍비조차 진짜 랍비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영화 초반부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잔혹함으로 관객의 사고를 방해했다면, 영화 후반부에는 작업대장 비더만의 죽음으로 야기된 급작스러운 전복과 탈출로, 관객들은 긴박감을 느끼며 동시에 드러나는 진실들-아들이 아닌가? 엘라는 누구고 사울과는 어떤 관계이며 사울은 왜 엘라를 모르는 척하는가? 랍비가 아니란 말인가?-에 허탈감을 느끼고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사울의 아들>


<사울의 아들>은 헝가리의 신인 감독 라즐로 네메스의 첫 장편 데뷔작으로 제68회 칸영화제에서 4관왕을 휩쓸고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은 화제작이다. 국내에서는 이동진 평론가가 별 다섯 개를 주면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사울의 아들>이 이렇게 큰 주목을 받은 이유는 독특한 촬영기법과 철저한 고증때문이었다. 영화는 4:3 비율의 화면크기를 사용하고 클로즈업과 롱테이크가 주를 이룬다. 또한 생생한 소리를 위해 후가공을 하지 않고 사울 주변의 다양한 소리를 풍성하게 집어넣기 위해 다른 영화에 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시각적 그리고 청각적으로 사울의 의식을 철저히 따라갈 수 있다. <사울의 아들>은 주로 얕은 심도를 사용하여 화면에 잡히는 사울 이외의 것들은 희미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사울의 의식에 잡히는 것들은 깊은 심도의 렌즈로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람들이 사울에게 필요한 대화를 나눌 때만 이들을 보여준다. 관객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주면서 사울의 인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울의 아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을 사울에게 동일시하게끔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등을 화면 가득히 보여주며 지나친 몰입을 방지하기도 한다. 존더코만도로서 그의 등에 표시되어 있는 붉은 X자는 더 이상의 동일시를 금하고 있는 듯하다.


존더코만도

: 강제수용소 내에서 특수 수용자 집단을 지칭하던 용어로 “비밀 운반자”라고 불리기도 하였음. 이들은 나머지 수용자들과 분리되어 생활하였으며 대개 몇 달 노역 후 처형당했다.


<사울의 아들>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존더코만도라는 존재를 다룬 최초의 영화이며 매우 사실적인 수용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극중에서 이런 수용소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라즐로 네메스는 존더코만도의 증언이 기록된 <잿더미로부터의 음성>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여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프닝에서 알려주듯 존더코만도는 특수 수용자 집단으로서, 학살당한 유대인 시신 처리 및 청소 등 온갖 노역을 맡아 했으며 증거 인멸을 위해 주기적으로 제거되었다. 영화를 통해 존더코만도의 규칙을 확인할 수 있다.

-포로로 온 유대인들을 안심시켜 가스실로 인도할 것

-가스실을 청소한 뒤 시신들의 유골을 태워 강에 버릴 것

-유대인의 시신은 ‘토막’이라 부를 것

-표적 표시인 빨간 X자가 그려진 옷을 입을 것

-독일군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 것

-독일군 앞에서는 모자를 벗을 것

-말을 해야 할 경우에는 독일어로 짧고 빠르고 간단하게 할 것


존더코만도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사울의 아들>은 다른 홀로코스트 문학 및 영화와 차별점을 갖는다. 기존의 작품들은 시대에 따라 가해자의 범위를 넓히고 있었는데, 이제는 피해자였던 유대인의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유대인의 경우, 처음에는 홀로코스트 내에서의 직접적인 피해자로서만 나타났지만 이제는 <아우슈터리츠>에서처럼 수용소 이후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한다. 아우슈터리츠는 어린이 수송 작전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박탈당했고 부모님이 수용소에서 살해당하는 등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내지 못해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된다. 아우슈터리츠는 홀로코스트 안에서의 학살은 피했을지라도 홀로코스트의 밖에서와 그 이후로 이어지는 비극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한편 존더코만도인 사울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사울의 아들>은 새롭다.


아이러니 속 인간의 존엄성


결국 사울은 왜 장례 절차에 집착하는 것이며 ‘사울의 아들’은 누구일까? 사울은 말한다. “우린 예전에 죽었어.” 그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존재이다. 인간으로서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곧 처리될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들도 그들이 처리하는 저 ‘토막’들과 같다. 불에 타 재가 된 후 강에 유기될 것이다.

모두 자신의 생존에 여념이 없을 때, 사울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바로 자신의 ‘아들’이다. 이미 죽은 존재이지만 사울은 그를 인간으로 취급하고 싶지, ‘토막’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다. 살아있는 존재도 결국에는 모두 ‘토막’과 같은 존재이니, 죽어서야 인간이 될 수 있는 아우슈비츠는 정말 상식 밖의 공간이다. 어쨌든 그가 아들을 인간으로 대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시신을 소각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그렇게도 모든 절차가 갖춰진 장례에 집착하는 이유이다.

그 소년이 결국 ‘사울의 아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상식이 상식이 되지 못 하는 공간에서, 그런 사실 관계는 의미가 없다. 그렇게 결론 내린다면,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기에도 바쁜 아우슈비츠에서 아들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타인을 챙기다니, 너무나 힘든 일이 아닌가. 사울은 ‘아들’을 통해 자신도 인간으로서 존재하려고 발버둥친 것이다. 모두의 만류에도 제대로 된 장례 절차를 추진한 것은 마지막 남은 자신의 인간성을 놓고 싶지 않아서이다. 이러한 사울의 시도는 성공했을까?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헛간에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한 소년이 그들을 쳐다본다. 피투성이의 낯선 이들이 이 소년은 두렵다. 소년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존재이다. 그런 소년을 보고 사울은 웃는다. 영화 내내 무표정이었던 사울이 처음으로 표정을 짓고, 인간으로 존재하게 되는 순간이다.

소년은 겁에 질려 도망갔다가 독일 군사에게 잡히고 풀려나 다시 도망간다. 그런데 독일 군사에게 잡혔다 풀려나는 모습이 마치 아우슈비츠에서 탈출에 성공한 생존자 같이 보인다. 카메라는 아이가 달려가는 모습을 끝까지 선명하게 담는다. 아이가 화면에서 사라져도 화면은 여전히 선명하다. 이는 똑같이 아이들이 존재했지만 흐릿했던 오프닝 장면과 비교된다. 어쨌든 소년은 살아남아 존더코만도들이 기록을 남겼듯이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또한 사울이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자 했다는 것을 전해줄 것이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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