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초등학생 4학년. 수녀님은 우리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려 한 가지 좋은 이벤트를 알려주었다.
"얘들아 곧 있으면 대부 · 대모님이 너희들 도와주실 거야!"
"대부 · 대모님이 누구셔요?"
"대부 · 대모님의 '대'자는 큰 대(大) 자를 쓴 거야. 말하자면, 후원자님이지. 부모님처럼 편하게 생각하면 돼."
나는 '부모님이 계신다'라는 생각을 딱히 하지 않았어서인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모님을 상시 생각해야 했던 건 '애착 불안' 때문이었다. 애착 불안, 방임적인 공포로 비롯된 공허함은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었다. 단지 좀 더 열심히 놀고, 열심히 기도 생활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때로는 잠시 호흡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삶이었다.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 있을 때면 잘 놀지도 못했고, 종교에 신실한 척 연기했으며, 공부는 꺼지다 못해 아예 나가버린 등전이었다. 선생님 곁에서 몰래 생활일지를 흘겨보았는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지만 밝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는 아이'였다. 또한 '신앙심이 깊고 영어와 미술에 열정을 보이는 아이'로 표현되었다. 선생님과 수녀님께 비치는 '일지의 나'와 실제 '내 생각'은 자석의 S극과 N극처럼 정 반대였다. 아무리 '순수한 아이'의 카테고리에 속해 있었다고 한들, 어린 시절에 큰 상처를 가진 순간부터 다르게 보이고 싶은 욕구. 즉, 페르소나는 두꺼워지기 마련이다. 어른의 직관에 일방적으로 개입하여 예기치 못한 변수를 줄 정도로 적폐였으며, 친화 정책을 펼치는 생활관 내의 의도와는 다르게 늘 혼자이기를 바랐다. 때로는 혼자인 것이 애버랜드나 캐리비안 베이에 가는 것보다 좋았다. 혼자서 남아 무언가를 곱씹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 철천지 원수만큼 사랑했다. 이토록 속속들이 새어나가는 인정 욕구를 막아주었던 건, 유별나고 이상하다고만 생각해 왔던 나를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주신 어른들 덕이었다. 엄마 수녀님은 생활반에서 최소 15~30명 정도의 아이들을 감당하셔야 했기에 자체적인 프로그래밍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보육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도 이태리 장인처럼 한 땀 한 땀 터진 보풀을 제거하고 다듬기 위해서는 소정의 시간이 필요했다. 소정의 시간이라 함은, 전체적으로 고른 옷 땀의 열을 맞추기 위한 준비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연꽃 아이들은 자신을 받쳐줄 안전한 수반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 염소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바깥 목자'가 어서 오길 바랐던 것이다. 그중 나는 유독 '애정결핍'이 심했던 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어쨌거나 우리는 대부·대모님과 처음 만날 날을 기대했다. 어느덧 견진성사가 다가왔다.
견진성사란 가톨릭 교회의 7 성사 중 세례성사 다음에 받는 의식이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원이 된 신자가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써 새로이 성령과 그 은총을 풍부히 받고 영혼에 그리스도의 병사로서의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받는 안수의 의식이다. 이 성사는 주교가 베푸는 것이 보통으로 정립된다. 주교가 신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십자가의 표지를 그으며, 성유를 이마에 바른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은 뒤에 견진 교리 공부를 시키고 견진 교리 찰고를 한 다음에 견진 자격을 부여한다. 견진성사를 받는 나이에도 시대에 따른 차이가 많았는데 일반적으로 7세~12세까지 적기로 보는 경향이 많았다.
견진성사를 받은 날, 미사가 끝나고 우리는 생활실에 모여 간단하게 단장을 했다. 어른들께 잘 보여야 하는 자리라서, 빗에 헤어스프레이를 한 덩이 묻혀 모처럼 앞머리를 반대로 쓱 올렸다. 당시 내림 머리만 고집했었기에 새로운 모습을 보고 하루 종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입꼬리가 좀체 내려올 수 없었다. 보육 선생님과 엄마 수녀님의 노력이 담긴 조언 덕분에 미소가 그대로 고정되었다. 오전 9시에 미사를 마친 후, 우리는 하나 둘 체육관에 기다리고 있는 대부 · 대모님을 만났다. 대부님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버락 오바마 닮았네?"
대부님은 내가 기분이 나쁘라고 그런 말을 하신 건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몹시 실망했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표정이 철판처럼 굳어졌고 '함구증'이 재발했다. '~닮았다'는 표현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오래도록 놀림을 받아와서 그랬던 건지 괜히 체육관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한으로 폐쇄적인 성격이 형성될 정도로 틈만 나면 시비에, 피부가 언급되면 어딘가에 숨어버릴 정도로 지극히 토끼귀였던 나는 11살의 평범한 어린이가 될 수 없었다. 대모님은 대부님의 어깨를 툭치며 시무룩했진 내 기를 살려주셨다.
"왜에~. 귀엽고만."
대부님은 내 안색을 살피시고는 금방 사과하셨다. 가볍게 볼 땐 별로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었지만 체육관을 뒤로하고 나서도 마음 한편 어딘가 찜찜했다. 이것이 나와 대부·대모님의 첫 만남이었다. 우리는 체육관에서 모임을 마치고 나서 배정된 대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다. 점심밥을 먹는 와중에도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의 유입이 적었던 2000년대 중반인 것을 감안해 숨통을 조여 오는 압박감 같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놓칠 수 없었다. 다소 불편했던 식사자리를 뜨고 나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저를 대자로 두신 거예요?"
대부·대모님은 잠시 수저를 들고 생각하는 듯해 보였다. 대모님은 티슈로 입을 쓱 닦으시고는 "하느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신 거야."라는 답변을 주셨다. 무슨 메뉴를 먹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났지만 왠지 소화가 잘 된 기분이었다. 이렇듯 다양한 상황에서 고립감을 일찍 경험한 아이는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고 고단한 일이 되었다. 불신감이 드는 것은 공포심에 기인한 방어기제였다. 보다 편하게 얌전히 앉아 있고, 좋은 아이였으면 싶었는데, 나름 잘하고 있다는 맘과는 다르게 몸도, 표정도, 눈빛도 그렇지 못했다. 자괴감이란 것이 인간의 자아를 좀 갉아먹듯, 느리고 꾸준히 깎아먹는 자기 파괴적인 감정이라서 통제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 무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둡고 거대한 공허감이었다. 사람만 봐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던 것이 모두 연기였다는 사실을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살아온 인생이 그다지 밝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누군가에게 기쁜 사람으로 비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려는 거대한 욕망이었다. 터놓고 말하자면, 앞뒤가 다른 양극의 태도를 보인 것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솔직하지 못한 에고(ego)였다. 나는 그동안 페르소나(persona)를 이용해 기쁘게 살아온 것처럼 흉내 내는 것이 지루해지면서도 매우 힘들어졌다. 이 분들 앞에서 과연 언제까지 밝은 얼굴로 연기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마비된 안면으로 살아가야 할까 등등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러 고립의 경험이 낳은 '사회친화적 괴물'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날이 갈수록 자존감이 떨어지는 이유도 아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유정 작가님이 쓴 저서 '완전한 행복'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간은 행복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진화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일을 충실히 살았을 때 자존감이 생긴다. 완성형 인간은 없다."
그러고 나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행복을 강요하는 사회는 나르시시스트를 만든다?'
대한민국은 단기간에 경제성장을 이룬 부유국이며, 그 후세대인 우리들 대부분은 기성세대의 사상에 관철되어 왔다. 이처럼 일처리가 빠른 행동방식이 자의식에 무의식적으로 상당 부분을 차지하여 타인을 배제하려는 국민의식이 틀과 균형을 잡고 있다. 이를 방점 삼아 국가적인 의식의 흐름은 국가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로 인해 유독 특징이 별난 사람을 생선 가시처럼 발라내는 일명 '깍두기'.라는 키워드가 생겼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깍두기는 이렇다.
'왕따처럼 괴롭히는 것을 목적으로 놀이에 끼워주지 않는 것과 달리, 깍두기는 팀에 끼지 못해 함께 놀지 못하는 친구를 배려하는 '긍정적인 용어. 성인 사회생활에서 깍두기는 조금 다름. 능력이 부족하고 어디에도 소속되기 힘든 상황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음.'
나는 이 문장을 보고도 한참을 이해하지 못했다. 최소한 '인싸'가 아니더라도 '중간'의 위치를 잘만 유지하면 깍두기일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약자의 입장을 고려해보지 않고 '긍정'이라는 말을 쓰니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선 상당히 의아했고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대한민국인 것도 의외였다. '깍두기 취급'을 당하는 건 굉장히 쉬운 일이다. 다른 친구나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고, 유별나게 생기면 되는 것이었다. 이들을 두고 일반 사람들은 '기행 하는 자',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기행'이라고 일컫는다. 일부러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 성격이 조용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후천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선천적인 경우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깍두기'를 듣는 사람의 입장과 배경지식에 대한 생각을 최소한으로도 하지 않고, 입체적인 사고를 건너뛴 채 선택한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회의 정의는 이와 같다.
'이상한 애.', '특이한 애.', '어울리기 싫은 애.', '이해하기 어려운 애.'
사실, 나는 이러한 지칭을 전적으로 동의했다. 어쨌거나 인간이라는 공통점은 피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 같이 데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속해있는 거라면, 더더욱 동의했다. 깍두기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관용적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지만 나는 이 단어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다. 깍두기는 내 인생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과 겹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동물원의 생활자인 동물 보듯이 보는 무언 폭행적인 시선이 공포가 내포하는 의미랑 다름없지 않은가.
깍두기는 김치를 담글 때 몸통을 사각형으로 썰어 마지막에 넣는 것으로, '조금 모자라도, ' 혹은 게임을 할 때 '게임 룰을 잘 이해 못 해도' 함께 데려서 진행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어릴 때 한국에서 지낸 해외인들은 입을 모아 '나도 게임을 잘 못하는 편이었는데 애들이 와서 나도 팀에 껴줬어.'라는 좋은 여담을 남겼다. 아쉽게도 나는 긍정하지 못했다. '붉은 깍두기' 보단 '검은 깍두기' 신세였다.
바둑판에 흰 돌 사이의 한 검정 돌만 봐도 이해가 쉽다. 그런데 결국 같은 바둑돌인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이 아직 문화다양성을 어렵게 생각하거나 평가주의 교육에 오랜 시간 고착화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다행히 요즘은 피부가 다른 일부 영웅들이 제 위치에서 활약하여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마음도, 음울한 생각도 조금씩 풀어지고 있는 추세다. 다음으로, 정유정 작가님은 관계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위로를 건넸다.
"관계라는 게, 손절이 지나치게 쉬워서는 안 되죠. 어떻게 해서든지 개선을 해봐야 되고 뭐가 불편하면 '내가 이게 불편하니까 네가 이걸 고쳐줬으면 좋겠다' 서로 조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거든요."
이후 작가님의 말이 끝나고 이런 문구가 떠올랐다.
[조율 과정 없는 빠른 손절]
"그 과정 없이 빠른 손절이 된다는 게 문제죠. 그건 정말 최후로 남겨둬야 할 어떤 것인데 소위 말하면 거미줄 치우는데 전기톱을 쓰는... 인생을 허무하게 만들고 자기를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그런 게 되기도 해요. 손절하기 전에 한 번쯤 더 생각해 보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아요."
식사를 치고 난 뒤, 통금 시간을 지키기 위하여 대부모님께 "먼저 가야겠어요."라고 말씀드리고 집(보육원)으로 도착했다. 다른 친구들은 일찍 와서 저녁기도를 막 시작하려던 때였다. 그날은 대부·대모님을 만난 첫날이라서 그날, 엄마 수녀님은 별다른 주의 없이 넘어가 주셨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서 대부님이 하셨던 말을 떠올렸다.
"대자가 된 것을 축하해. 아까 점심엔 많이 미안했으니까 대부님이 노력할게, 미안해."
다음 날을 기약하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타인의 노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본인만의 입장을 강요한 것에만 집착하고 생각이 서투른 내가 미웠다. 고집쟁이인 스스로가 몹시도 부끄러워 그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이토록 특별한 날을 눈물로 보내기 싫었지만, 다행히도 그 눈물은 부끄러움의 눈물이 아닌 감사함의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