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합시다'는 IMF시대를 맞아 많은 국민들이 실의에 빠졌을 때, 남모르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릴레이 형식으로 소개하면서 대한민국에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칭찬에 인색한 대한민국의 문화에서 적극적인 칭찬으로 선행을 독려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국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서민들을 위한 희로애락 예능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1999년 8월, 2000년 2월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교민을 찾아가 '칭찬'이벤트를 마련했다. 제작진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칭찬 주인공들에게 ARS를 통해 모금된 성금을 전달하고 격려했다. 당시 '칭찬합시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을 모아 앞서 출연한 사람들 중 감동의 칭찬주인공, 기쁨의 칭찬주인공, 희망의 칭찬주인공을 선정했다. 그 주인공은 이런 분들이었다.
장애로 불편해도 무허가 비닐하우스에서 지체장애인들을 돌보며 살고 있는 사람,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젓갈을 팔면서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 사람, 장애를 가진 친구를 도우며 왕따 없는 교실을 만들었던 학생들... 이처럼 시청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은 사람들이 프로그램의 취지와 코너를 통해 뚜렷한 존재감을 뿜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1999년 1월 26일부터 2001년 11월 2일까지 방송되었던 예능 프로그램이며, 이후 방송인 김국진과 김용만이 초창기 MC를 보았고 프로그램은 잘 되면서 여러 차례 MC가 바뀌었다.
'칭찬합시다'의 연출자인 최원석 PD는 "장애인이나 소외계층에 관한 문제를 유쾌하게 풀어내어 시청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짧은 시간에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며 "앞으로도 지금까지의 색깔을 유지하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나는 1999년에 [칭찬합시다]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12살에 4박 5일로 지내게 된 양부모님 집에서 확인한 바 있다. [칭찬합시다]를 촬영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요?"하고 어머니께 여쭤보자 확인시켜 주겠다며 텔레비전을 켜셨다. 결국 나중이 되어서야 VOD(통신망 연결을 통하여, 사용자가 칠요로 하는 영상을 원하는 시간에 제공해 주는 맞춤 영상정보 서비스 / 주문형 비디오라고도 함.)를 통해 알게 되었다. 4살이었던 나는 '칭찬합시다'에 출연한 이유를 잘 몰랐었지만 사회적 약자이고, 그런 사람들을 돌봐주셨던 분들이 이 사회의 영웅이었다는 것과, 삼촌은 양어머니의 친동생으로 그분을 지키는 영웅이었다는 걸 어른이 된 후로 깨닫게 되었다.
2007년 여름. 보육원의 초등학교에서는 여름방학을 진행했다. 나는 보육원 5층에서 생활했으며, 생활실 복도 한 층에는 여러 개의 생활실과 중간에 입구가 있었다. 입구 바로 옆은 어느 층이건 연락이 가능한 인터폰이 비치되어 있었다. '인터폰'은 유선으로 연결된 가정집마다 있는 전화기이다. 인터폰은 보통 중요한 일로 1층 행정실에서 특정 학생을 호출할 시에 걸려왔다. 인터폰이 울리면 근처에 있는 애들은 동요했지만 앵간해서는 전화를 잘 받으려 하지 않았다. 막중한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내용을 전하기 위해 다른 층에서 전화를 걸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받아야 했고, 해당 층의 수녀님이나 보육사 선생님께 잘 전달해야 했다. 만약, 정보전달에 오류가 생기게 되면 책임을 묻는 상황으로 넘어가고 그 학생은 혼쭐이 났다. 그러나 책임감 있는 친구는 곧잘 인터폰을 받았다. 화장실을 가려던 중 때마침 인터폰이 울렸다.
'따르르릉-.
나는 인터폰을 받지 않으려 화장실로 뛰어갔다. 다른 친구가 전화를 받자 전화를 받은 친구가 날 불렀다.
"야아! 너 내려오래."
그 친구는 바로 수녀님께 보고했고, 수녀님은 1층으로 내려가라고 하셨다. 간소하게 짐을 챙긴 후 내려가던 중, 친구들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인터폰은 중요한 일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걸려오지 않았다. 혹여 걸려오면 중요한 일에 대한 정보 거나, 예외로 행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인터폰내용은 양어머니와 삼촌의 '가족호출'이었다.
1층에 도착하자 양어머니와 삼촌이 서 계셨다. 두 분은 날 보시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경도비만이었던 육중한 내 몸을 끌어안았다. 삼촌과 양어머니는 가정적인 온기로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8살에 뵈었던 양어머니와 삼촌은 겉모습이 거의 그대로였다. 삼촌의 머리가 조금 더 까진 걸 빼고 말이다. 나는 8살 적 보다 33센티미터나 훌쩍 자랐다. 사춘기 전조였던 것이 급성장한 원인이었다. 우리는 1층 중앙에 있는 현관 밖으로 나갔다. 야외수영장 옆에는 연회색 이스타나가 주차되어 있었다. 삼촌은 차의 중앙문을 열어 깔끔한 에스코트를 선행하셨다. 어릴 땐 넓게만 느꼈던 그 차는 더 이상 큰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중앙 시트는 보육원에서 단체로 쓰던 온돌장판 같았다. 시동으로 연신 헛기침을 뱉던 이스타나는 애써 목에 걸린 검은 가래를 가라앉히면서 갑갑한 시설을 빠져나갔다. 삼촌은 말이 많은 편이었다. 언변이 그다지 좋진 않으셨지만 목소리에 힘이 넘쳤고, 따뜻하고, 다정하셨다.
"주호, 잘 지냈어? 그새 많이 컸네~."
키가 컸던 건 사실이지만 나는 내가 잘 지냈는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아주 정신없었다. 시설에서 생활하다가 남몰래 묵힌 불만들을 이 분들께 털어놓으면 엉킨 아픔이 왠지 그들로부터 빚어지는 것 같아 될 수 있으면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별 도움 안 되는 얘기만 해봤자 좋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에 그들의 반응에 어떤 대답을 할지 고민이었다.
"아유 별일 없죠~. 엄마와 삼촌은 잘 지내셨죠?
예의상 그분들께 안부를 여쭈었다.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 이 분들께 해가 된다면 내 존재는 첸체를 떠도는 우주 쓰레기처럼 가치가 없어질 것으로 여겨졌기에 오만가지 망상에 빠져 자기 위로하곤 했다. 삼촌과 양어머니는 잘 자라주었다면서 침이 튀도록 칭찬하셨다. 우리는 '공백 기간'동안 서로를 잘 몰랐어도 신이 주신 인연이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모두가 단시간에 수다쟁이가 될 무렵, 어느새 부천은 가까워졌다.
약 1시간 뒤. 부천에 도착했다. 주홍색 뙤약볕이 내려쬐는 늦은 오후가 되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기에 이마 위에 대각으로 손을 세워 삼촌과 양어머니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몇십 걸음 뒤에 꿈에서 나온 그 집을 확인했다. 꿈에 나왔던 전원주택과 일치했다. 얼른 집 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삼촌과 양어머니의 걸음을 맞추기 위해 빠른 걸음을 일부러 늦췄다. 날 적부터 철저히 합리적이었고 계산적이었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눈치를 가진 특별한 능력자이기도, 그러나 별 거 없는 능력이기도 했다. 양어머니는 문간을 짚으시고 거실로 들어와 당신의 손에 들린 짐을 소파 옆에 내려놓으셨다.
"주호야. 집 오랜만이지? 잠깐 둘러보고 있어~. 잠은 이 방에서 자고 4박 5일 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해."
하고 싶은 거 다하라는 양어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방 뛰었다가도 어느 부분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발구름을 멈췄다. 살을 빼야 했지만 잘 먹고 잘 크면 장땡이었다. 집에서는 누릴 것이 정말 많았다. 컴퓨터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간식도 먹을 수 있었다. 집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거대한 안마의자도 사용할 수 있었다.그날 나는 컴퓨터를 켜 게임을 했다. 양어머니께서 밥을 얹으시는 동안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했다. 보육원에서 오랫동안 억눌러온 욕구를 그곳에서는 시간제한 없이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컴퓨터 게임을 하는 동안 주방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인생에서 처음 먹게 될 집밥이 준비된다는 게 식욕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가만히 게임만 할 수 없어서 주방으로 가 서빙을 도우려 안방을 나왔다. 주방에 들어가려 하는 순간 양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주방은 가면 안 돼. 남자는 주방에 가는 거 아니야."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국적인 문화가 있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그래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다 식탁이 썰렁한 걸 보고는 행주에 물을 묻혀 식탁을 닦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했다. 요리와 서빙은 양어머니께서 직접 하셨다. 삼촌은 작업실에서 안경을 쓰고 열심히 무언가를 보면서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고 계셨다. 곧 식사시간이 되었고 양어머니는 마지막 반찬을 꺼내오시며 삼촌을 불렀다. 요지부동으로 방에서 나오지 않는 삼촌을 불러 식탁에 같이 앉았다. 나는 삼촌과 마주 앉았고 양어머니는 가운데 앉아계셨다. 양어머니는 기도를 하자며 눈을 감아 성호를 긋기 시작했고 삼촌은 따라서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읊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기도가 끝난 뒤, 양어머니께서 먼저 숟가락을 들길 기다렸다. 눈앞에 있는 '최초의 집밥'을 먹고 싶었다. 양어머니는 웃으시며 얼른 맛있게 먹으라 하셨다. 우린 이구동성으로 "잘 먹겠습니다."하고 구수한 국이 담긴 수저를 입으로 훔쳤다. 짭조름한 그 맛은 과거의 향수를 일으키는 환각제였다. 시간이 멈췄던 3살에 양어머니께서 떠먹여 주려 하셨던 어렴풋한 기억이 머릿속에 흘러들어 왔다. 양어머니께 여쭈었다.
"엄마, 저 3살 때 미역국 안 먹으려고 도망간 거 기억나요?"
"그래, 기억나지. 그 쪼꼬만 게 너무 말랐었고 밥 한 숟갈 먹이는 게 어찌나 힘들었는지."
삼촌도 한 수 거들었다.
"야. 너~그때 진짜 말 안 들었어."
3살의 난 새로운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가정집에 안정감을 찾지 못했고 불편해했으며, 친부모님에게 버려져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웃을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마음으로 품은 부모님 덕분이었다.애착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지속적인 유대감이다. 애착 손상은 영유아기에 증상이 두드러지지 않아 숨겨진 트라우마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크 라이닝턴 박사에 따르면, "발달 트라우마라는 카테고리 안에 애착 손상이 있다. 하지만 발달 트라우마는 애착과 상관없는 이유로 외상을 입어 생길 수도 있다"라고 2018년 서울 교대에서 열린 감정코칭협회 학술회에 강연한 바 있다.
'애착 손상'이란 보통 부모와의 정서적 유대감 결핍으로 발달 트라우마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이 겪는 증상이다. 원초적 불안감과 불신감 때문에 성숙한 자아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해 '정서적 흙수저'라 불린다.
덧붙여 학술회에 마크 박사와 함께 참석한 최성애 박사님은 "발달 트라우마는 선천적인 게 아니라 어린 시절 아이가 정상적 발달을 위해 필요한 정서적 돌봄이 없을 때 생긴다. 이와 반대 증상이 '사고 트라우마'다. 성폭행이나 학대 등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 벌어질 때 생기는 것"이라고 덧붙이셨다.라이닝턴 박사님은 "양육자가 아이를 기를 때 '가용성'과 '반응성'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가용성은 아이들이 다치거나 아파서 힘들어 달려갔을 때 '누가' 있는지를 의미한다. 요즘 사회에서는 아이가 필요로 할 때 부모는 일하느라 집에 없는 경우가 많다. 반응성은 아이의 말이나 행동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말한다. 양육자가 상처받은 아이에게 "놀랐구나", "많이 아팠겠다"라고 반응해주지 않고 차갑게 대하거나 무시하면 아이는 위축되거나 문제를 회피해 버릴 수 있다. 실제 상담해 보면 집도 잘 살고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어릴 때 부모가 돈 버는 데만 집중해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많다. 부자가 되기 위해 부모들 스스로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른 셈이다. 교사도 학생들의 문제 행동을 볼 때 부모의 사화적 지위나 가정형편을 따질 게 아니라 가족의 친밀감이나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어떤지 살펴봐야 한다. 한국 사회도 50~60년 동안 경제 성장에 올인해 왔다. 일과 돈에 집착해 아이를 어린이집과 학원에 내맡겨 애착 손상이 대량으로 발생했다."라고 지적했다. 최성애 박사님은 "모르면 배우면 된다. 중요한 건 아이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뇌는 죽을 때까지 변하기 때문에 부모와 아이 모두 새로운 경험을 통해 손상된 뇌를 회복할 수 있다. 감정코칭, 회복 탄력성{고난과 역경에 대처하는 힘뿐만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를 비축해 주도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훈련이 애착 증진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라이닝턴 박사님도 "애착 문제를 이야기할 때 누구 탓이냐를 따지기보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애착은 유산처럼 물려받은 부가 아니라 '획득된 안전'이다. 애착 손상을 겪었다면 심리치료나 애착 기반 프로그램을 통해 긍정적인 경험을 만들어가면 된다. 가정에서 힘들면 학교나 회사 동료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라고 이어 말했다. 결론적으로 두 박사님은 "가정이나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의 애착 손상을 알아차리는 교육이 필요하다."라고 재 강조했다.
애착 손상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필요한 것은 '감정코칭'이다. 감정코칭은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게 해 주고, 선생님이나 부모님과 신뢰감, 친밀감, 유대감을 쌓게 해 주는 중요한 열쇠다. 아이와 어른이 적이 아닌 한편이 되도록 연결해 주는 것이다. 감정코칭은 일방적으로 어른의 말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문제 상황을 좀 더 넓게 보고 더 바람직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우울한 현재의 시대에 필요한 특효약이다. 조던 피터슨 교수님은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란 자신의 책에서 몇 가지 중요한 특효약을 알려주셨다.
하나,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둘,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셋,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넷,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 하고만 비교하라
다섯,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여섯,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일곱,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택하라
여덟,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마라
아홉,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해라
열,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
열 하나,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는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열둘, 길에서 고양이를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
특히 '알아차림'과 '감정코칭'은 감정적 상황에서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고 이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적절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이 두 가지가 있다면 후천적으로 심각한 애착 손상을 입은 사람도 충분히 고칠 수 있다. 내가 겪은 고통을 후세대에 똑같이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정말로 힘쓰고 싶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우리 같은 친구들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러고 싶었다. 가족을 지키는 건 오직 자신, 우리 자신이란 것을 상기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토록 바라던 화목한 가족이 현실이 되었다. 가볍지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그간의 서로가 몰랐던 이야기를 하는 것과 따뜻한 집에서 밥을 먹는 것, 옆에서 챙겨 주는 것 등등. 행복이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온기 가득한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식사하는 사실만으로도 완전한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