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칭찬합시다 ⑵

가정생활 체험은 옳았다.

by 언데드

천주교에는 '미사'라는 개념이 있다. 미사는 가톨릭 신앙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종교의식으로 하느님에게 드리는 제사이다. 내가 생활했던 재단법인 보육시설에서는 매주 일요일 아침에 미사를 진행했다. 저학년이었을 땐(8~10세) 일요일 아침에 미사를 했고, 고학년이 된 이후부터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에 했다. 세례성사를 받은 천주교 신자는 11살에 의무적으로 미사 중 견진성사를 받았다. 세례성사란 성사 중 가장 기초적인 성사이자 공식적인 입교 의식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성세 성사라고도 한다. 세례성사는 견진성사와 성품성사와 함께 효력이 영원히 철회되지 않는 성사로,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사람이래도 세례성사 때 받은 인호와 효력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원죄(창세기 성서에 등장하는 아담이 선악 열매를 먹고 탄생했다는 죄)와 세례 이전에 지었던 죄를 용서받는다.

내가 약 3살에 받은 유아세례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종교를 접해 신앙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 자기 의지나 결정권과 무관하게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나 보호자에게서 전수받은 신앙을 가리키기도 한다. 기독교의 기준으로, 모태신앙을 가진 신자들 거의 대부분은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가톨릭의 경우 10살 전후로 첫 '영성체'(가톨릭에서 성체성사를 받는 일. 기독교의 성찬식)를 한다. 다른 사례로 부모로부터 성당 복사(미사와 같은 전례를 거행할 때 사제 곁에서 돕는 사람. 또는 그런 일) 활동을 권유받는 경우도 있다. 천주교 신자가 되면 11살에 의무적으로 견진성사를 받는다.


식사 후 나는 삼촌과 어머니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그분들은 분위기를 재미있게 이끌어가려는 듯해 보였으나, 지루했던 내 마음을 온전히 그 영역으로 끌어들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적어도 아무도 없는 상태로 혼자 식사를 하는 것보다 누구라도 있는 편이 나았기에, 삼촌과 어머니와 함께 웃는 품성 바른 태도를 유지했다. 가식을 모두 걷으면 결국 외로이 남는 건 행복이다. 거짓 없는 본심이다. 수저에 비친 얼굴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난 후 우리는 마침 기도를 했다. 흡연자는 식사 전, 후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 일상이듯, 충실한 종교인은 식사 전후에 기도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번엔 삼촌이 먼저 기도를 시작했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아멘.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이제와 영원히 받으소서. -이제와 영원히 받으소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기도를 통해 나는 비로소 경건한 마음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 일시적인 수양인가, 영원한 안식인가. 기도가 끝난 후 보육원에서도 그랬듯 설거지를 하기 위해 그릇을 모으고 싱크대로 향했다.


"아냐, 아냐. 내가 할게."


어머니는 걸음을 멈춰 세우셨다. 보육원에 있을 땐 설거지가 싫었는데. 결국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싱크대에서 물러나야 했다. 식곤증 덕분에 잠 오지 않는 바람으로 어머니께 "저 잠시 잘게요, "하고 거실로 갔다. 열린 문틈 사이로 훔쳐본 삼촌은 안경도 안 낀 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밥 먹자마자 일하시는 모양이었다. 나는 꺼벙이처럼 끔뻑끔뻑거리다 안마의자에 누워 잠을 청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초침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겨우 6시. 안마의자는 푹신한 소파처럼 되어있었고, 그 옆에 리모컨이 있었다. 리모컨은 아파트 엘리베이터같이 동그란 버튼이 많았다. 성인 키만 한 안마의자에 몸을 뉘이고 아무거나 눌러댔다. '웅~'하는 소리가 나더니 창조주 점토 주무르듯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앗, 아아!!"


하마터면 뒤에 귀신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 꺼림칙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나는 종종 기분 나쁜 꿈을 꾸곤 했다. 마치 누가 뒤에서 노리는 듯해 심장박반응이 빠르게 일어났다. 식은땀이 흘러 소름 돋았다. 약 30분이 지나도 안마의자에서 풍겨 나오는 떨떠름한 기운을 먼지떨이로 떨칠 순 없었다.


'포기할까? 아니면 그냥 해?'


불편한 감정에 새살이 돋기 전,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야말로 공포를 직접 마주해야 할 때라는 걸 직감했다. 몸 닿는 것이 예민했던 난 고통을 감수하기로 하고 앙다문 입아래 턱으로 전부 눌러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질끈 감은 눈이 죽은 불가사리 세포처럼 되어 축 늘어졌고 금방 잠에 들었다. 이윽고 꿈이 펼쳐지자 하얀 소복차람의 주름진 이상한 할머니가 다가오려고 했다.


"마, 이리 오래이... 아그야."


무서웠다. 곤함에 휩쓸려 자려는 시도는 계속되었고 할머니는 시간이 갈수록 가까이 다가왔다. 아래를 보니 없었는데 둥둥 뜬 채로 배회했다. '신인가?' 하는 기대에 준한 의심도 들었다. 늙은 상판을 보니 귀신이 맞았다. 아니면 무의식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영혼일 수도 있겠지. 차가운 할머니 손이 볼에 닿는 순간 이상한 귀신은 사라졌다. 현실감각이 돌아오자 안마의자는 멈추었다. 젠장, 젠장. 별 거 없었다.

어느새 12시 반이 지났다. 이건 뭐,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도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몽롱했다. 잠시 기절했을 뿐 방전된 신체 배터리는 무의미한 고랑 파기에 바빴다. 뻐근했던 건 나아졌지만, 알 수 없는 피로감은 바퀴벌레급 생명력이었다. 안방에 이불을 펴고 얌전히 누웠다. 불을 끄고 군청색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 창문의 반 뼘 정도 여운만 남겼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서 이내 잠이 쏟아졌다. 이상한 꿈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도 나오지 않았다. 포근했다. 마치 있어야 할 곳에 누워야 했던 태초, 가이아의 땅처럼.

다음날 아침, 해가 밝았다. 맛있는 냄새가 나 이불을 개고 식당으로 가보니 어머니가 만둣국을 끓이고 계셨다. 고소한 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만두를 '인간 사료'로 꼽는 별미로 꼽을 정도로 좋아할뿐더러, 더군다나 만둣국이라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엄마, 저 만둣국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잘 잤니? 만둣국은 나도 좋아하는데~ 맛있게 먹어야 잘 크지."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이상적인 모자 같았다. 그때 다른 방에서 덜컥 소리를 낸 주인공은 삼촌이었다. 뭔가 어제보다 더 신난 반응이었다.


"우와~ 만둣국이네~ 오늘... 주호거 없다~."


우린 식당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사소한 개그마저 삶의 원동력이었다. 삼촌은 은근히 개그맨이었다. 말투로 느껴지듯 마음씨 곱고 온정 많은 분이셨고 무엇보다 어투가 재밌었다. 그런 삼촌이 너무 좋았다. 나는 막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감정을 숨기기 바빴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두 발 자전거를 처음 타는 아이처럼 서툴렀다.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두 분을 오래간만에 뵙자니 어색한 것도 여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두 분은 양로원을 주축으로 일하시는 분들이셨다. 당신의 인생에 모자란 나를 들였던 건 틀림없이 행복한 결속이자 연결고리다. 그렇기에 나는 삼촌과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만약, 그분들이 날 보호시설에 맡겨놓고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억들과 앞으로 쌓아나갈 추억거리는 애초에 없었다. 그것들이 한데 모여 사골 만둣국으로 채운 아침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음식인지, 사랑인지. 남김없이 몽땅 긁어먹었다.

저녁이 되고 나서는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꼬기꼬기 게임을 했다. 보육원에서는 마음대로 컴퓨터를 이용하지 못했다. 반 별로 주 1회씩 컴퓨터실에 들렀다. 벌칙을 받으면 한 달에 한 번만 갈 수 있었다. 생활반마다 수녀님의 지침으로 룰이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적으로 규칙 아래 컴퓨터실을 이용했다. 그날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황색 물고기가 자기보다 더 작은 물고기들을 먹으며 성장하는 게임이 무엇보다 재밌었다. 메이플 스토리와 크레이지 아케이드를 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순진무구한 게임을 했지만 여유롭고,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느 날 누나가 집에 찾아왔다.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서 내가 집이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진 것이었다. 누나 옆에는 앞머리를 일직선으로 자른 조그마한 아이가 있었는데, 정말 귀여웠다.

외동인 내게도 조카가 있었다. 정확히는 외조카였다. 나는 그 아이의 외삼촌이었고 그 아인 겨우 3살에 성인 허벅지에 머리가 닿지 않을 만큼 작았다. 아이 엄마는 양어머니의 친딸이다. 나는 그분을 누나라고 불렀다. 15년의 간격이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배울 점 하나라도 있으면 누나, 보다 큰 사랑이면 누나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온 가족들이 모여 제사 지냈다. 천주교인도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모르는 것투성이 사회를 대부모님과 선생님과 양어머니 가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날 말고 외부에서 오래 지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 지내는 동안 가끔 외부에서 생활했던 북두칠성처럼 반짝이던 일들은 매우 특별하고 소중했다. 상에 차려진 유과를 집어 날름 취식했다.

8살, 누에고치처럼 생긴 과자가 담긴 녹색 통을 들고 온 수녀님이 "이것 좀 받아."라고 하셨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날 이후로 찾기 힘들었던 과자를 엄마 집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반가웠다. 다리 없는 벌레를 혐오하는 트라우마는 갖고 있었지만 달달한 누에 과자는 주 성분부터가 다르니 의심할 여지의 틈조차 줄 수 없었다. 유과는 마시멜로와 같은 식감으로 폭신하고 달달했다. 달짝지근한 실낱들이 베어 문 이빨 사이로 침입하면서도 코와 혀를 전율시키는 매혹적인 향들로 달여져 뿜어 나왔다. 수정과나 식혜를 곁들이면 브라보였다. 때마침 수정과와 살짝 불려진 식혜 통이 식탁에 있었다. 식혜를 입에 대는 순간 누나가 말렸다.


"그거 컵에 따라먹는 거야. 그걸 통째로 다 먹으려고?"


음료수는 보통 통째로 먹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있을 때에만 컵에 따라먹는 줄 알았다. 그날 이후로 예의범절이라는 것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과한 욕심이 대참사를 부르지 않도록, 올바르지 못한 행동과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했다. 실수하면 실수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무엇을 더 양호하게 했나를 물었다. 문제행동의 원인을 살펴보고 작게 나누어 처리할 일부터 하나씩 지워가는 편이 정신건강 개선에 보양식이었다. 배우지 않음과 미룸에 대한 대처법인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걸 나는 가정생활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인생은 배워야 진실로 살 수 있다. 진실로 가정생활 체험은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