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과 벌에 대한 강연
한국에 발도르프교육을 처음으로 소개하며 교사교육에 오신 슈나이더 박사의 ‘칭찬과 벌’에 대한 강연을 들으며, 나는 오래된 질문 하나를 다시 붙잡게 되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과연 올바르게 칭찬하고 올바르게 벌을 주고 있는가.
벌은 아이를 망가뜨린다는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가능하다면 벌 없이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바람도 늘 마음 한편에 있다. 그런데 아이의 나이에 따라 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제는 ‘벌을 주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벌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9세 이전의 아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나의 큰 인과로 받아들인다. 엄마를 속인 날, 놀다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나면 아이는 그것을 벌이라고 여긴다. 그 상처는 아프지만, 아이는 이상하게도 그 경험 속에서 균형을 느낀다. 잘못한 일과 아픔이 연결되며, 아이는 그 일에서 한 발 물러난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세상은 더 복잡해진다. 9세 이후의 아이에게 벌은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공평해야 한다. 같은 잘못에는 같은 벌이 주어져야 한다는 감각이 생긴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벌이 더 이상 관계를 회복하는 도구가 아니라, 불합리함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은 벌을 행위의 크기가 아니라 ‘동기’로 판단한다. 훔쳤다는 사실보다, 왜 훔쳤는지가 중요해진다. 이 지점에서 나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깊은 윤리 감각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슈나이더 박사는 벌이란, 세상과의 관계를 다시 제자리에 놓는 일이라고 말했다. 관계가 깨졌다면, 벌은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 경험이어야 한다고. 이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벌은 고통이 아니라, 복원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칭찬도 마찬가지다. 무조건적인 칭찬은 아이에게 공허하다. 아이들은 언제 자신이 진짜로 인정받는지를 알고 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은 결과보다 ‘하려고 했던 마음’이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성과로 아이를 평가하고, 보상으로 아이를 길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칭찬은 아이를 조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힘을 건네는 말이어야 한다. 그 말이 가볍게 흩어지지 않도록, 꼭 필요한 순간에 건네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