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소장 백
어릴 적 나는 공사장 담벼락에 붙은 안내문을 유난히 진지하게 읽는 아이였다.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관리소장 백.”
그 문장을 볼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 공사장 소장님 성은 백 씨구나!'
굴착기가 요란하게 움직일 때도, 먼지가 자욱할 때도
저기서 일하시는 분들 중에 백 소장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그 사람이 이상하게도 친근했다.
한문을 배우고 나서야 알았다. 그 ‘백’이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드리는 말씀’이라는 걸. 그 순간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웃기기도 했고,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 괜히 더 열심히 한문을 공부했다. 다시는 백 소장님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국어시험에서 ‘은하수’를 한자로 쓰는 문제가 나왔을 때도 비슷했다. 아는 글자 같아 연필을 들었다가, 자신이 없어 내려놓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내가 떠올린 글자가 맞았다. 나는 틀린 게 아니라, 망설였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 배움은 늘 그랬다. 조금 늦고, 한 박자 뒤처지고,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글을 쓸 때면 습관처럼 한글로 쓰고, 속으로 한자를 한 번 더 떠올려 본다.
공부라기보다는 오래된 버릇이고, 버릇이라기보다는 어릴 적 나에게 보내는 조용한 다짐에 가깝다.
다시는
백 소장님을 만들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