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오래전 반가사유상 앞에 서 있던 시간이 떠오른다.
영원한 삶,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이 안이 되는 삶에 대해 썼던 글을 다시 꺼내 읽는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반가사유상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 앞에서 세 시간 가까이 움직이지 못했다.
조형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보았기에 저토록 평안한 얼굴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가 바라본 세계는 어떤 세상이었을까.
명상 끝에 도달한 사고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사유상의 손이었다.
사람의 몸을 표현할 때 손과 발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손은 그 사람의 자아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그림 속 손과 발이 쭉 뻗은 선으로 남는 모습을 떠올린다. 아직 자아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는 것은 아닐까.
반가사유상의 손은 정제되고 확고했다. 그 미소와 함께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제시하는 듯했다. 보는 이에게 기쁨을 주면서도 묵직한 질문을 남기는 얼굴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장천 1호분 입구에 새겨진
작자 미상의 시 「영원한 삶」 또한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하늘 아래 땅이 있고
하늘 향한 땅이 있네.
하늘 아래 내 젖줄이 흐르고
하늘 우러러 내가 사네.
생사의 경계를 넘어
우리 노니는 곳에
부처도 신선도 춤을 추네
여기가 내세의 낙원일세.
이 시를 쓴 이는 내세의 낙원을 죽음 이후로 미루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 이 땅에서 먼저 살아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이 안이 되는 삶.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자리.
정신과 물질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 삶.
반가사유상은 그 삶을 생각으로만 두지 말고
손과 발로 만들어 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부인의 손을 잡는 시간을 조금 더 의식적으로 늘리고 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안과 바깥이 끊임없이 뒤집히는 그 무한한 동작 속에서
나는 오늘도 부인과 함께 영원한 삶을 기원한다.
그리고 조용히, 인간학을 사유에 머물게 두지 않고
삶의 가장 가까운 자리로 옮겨 부인에게 적용해 본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