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차이 속에서도 내 정체성을 유지하는 법
- Prologue-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토종 한국인'이다. 해외 경험은 학부생일 때 영국 교환 학생 1년이 고작인 내가 그때의 기억으로 영국에 정착을 꿈꾸며, 만 서른 하나에 워킹 홀리데이 비자 하나로 무작정 온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그동안 원하던 곳에 취업도 하고 이만하면 외롭지는 않겠다 싶을 정도의 친구들도 사귀었다. 영국인 남자친구와의 연애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올해 여름쯤에 회사에서 비자 스폰서십을 해주기로 약속도 받았으니 그렇게 20대 내내 노래를 부르던 '영국 정착'의 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취직을 해서 비자 스폰을 받고, 미래를 함께할 수 있는 안정적인 파트너가 생기면 모든 게 해피 엔딩일 줄로만 알았는데 또 다른 고난과 역경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큰 부분은 역시나 문화 차이에서 오는 정체성 혼란. 나는 나 스스로를 '한국의 정서보다는 열려 있는, 그렇지만 서양 문화보다는 조금 닫힌'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래서 나에겐 한국이 늘 답답한 우물 같았다. 그래서 타지 생활을 하더라도 특유의 유연함으로 문화 차이를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큰 오산이었다. 아주 사소한 차이에서부터 한국의 정서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나는 매일 맞닥뜨리는 그 간극 사이에서 어떻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행동해야 할지 늘 방황했다. 내가 한국에서 배우고 맞다고 생각해 온 방식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이곳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나를 맞출 것인지 말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동생이 갑자기 '이거 완전히 언니 이야기 같아' 라며 사진을 보내주었다.
영국 리버풀에 설치된 서도호 작가의 '브리징 홈 (Bridging Home)'이라는 작품에 대한 글이었는데, 이 작품의 의도는 낯선 대도시에 새로운 정착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문화 차이와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고, 작가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나라 간, 문화 간 이주를 통해 느낀 기억, 이주에 대한 감정, 이민자의 다양성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한다. 정말 강렬했다. 진짜 내가 고민하던 것 그 자체였다.
지난 1년간 크고 작게 문화와 가치관 차이를 겪으면서, 둘 중에 꼭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압박이 나도 모르게 있었다. 이곳에 와서 현지인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문화 차이에 대한 극복을 넘어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는데 그 과정이 늘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이 중간에 낀 한옥 사진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한옥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가옥이다. 한옥의 우수성은 말할 것도 없고 독특한 건축 양식이 외국인들에게도 호평을 받아서 수출까지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자친구와 작년 10월에 같이 한국에 갔었는데 한옥을 소개해 주고 싶어서 한옥 에어비앤비를 예약했었다. 평생을 침대에서만 자본 남자친구에게 너 이제 한옥에 가면 바닥에서 자야 한다며 우스갯소리로 협박을 했었는데, 사실 그 숙소는 겉은 완전히 한옥의 모습이었지만 안의 내부는 모던한 디자인의 '퓨전 한옥'이었다. 폭신한 침대와 티 테이블, 주방에는 최신식 스피커와 커피 머신이 있었다. 남자친구는 그곳에 머무르는 내내 아름답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퓨전 한옥이 한국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한옥의 전통적인 모습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내부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리모델링해서 기존 한옥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은 되살렸기 때문이다. 전통과 현대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래. 해답은 이거다. 내가 원래 가지고 태어난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타지 생활을 잘할 수 있는 법, 마이너리티(Minority)를 오히려 나의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법, 나를 바꾸지 않고도 나와 다른 사람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고, 다른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내 정체성을 유지하는 법.
나는 이곳 영국에서 '퓨전 한옥'이 되기로 결심했다.
마무리하며....
브런치에서 그동안 '30대 워홀러 이야기'라는 다소 포괄적인 주제로 글들을 써왔는데 이젠 브런치 북 출판을 목적으로 '영국에서 퓨전 한옥으로 살기'라는 주제의 글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직장 생활, 인간관계, 연애/결혼 등 영국에서의 삶 전반에서 한국인으로서 겪는 다양한 문화/가치관 차이,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저의 경험과 생각들을 글로 공유하면서 저와 비슷한 고민을 갖고 계신 분들과 공감하며 소통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