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 말하는 영국인과 직설적인 한국인의 사이
영국에 오자마자 들은 경고 중에 하나는 영국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영국인들은 예의가 너무 바른 나머지 지독하게 돌려 말하기를 좋아한다고.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수식어답게 한국인들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예의가 바르기로 유명하다. 나는 사실 한국인 사이에서도 꽤 직설적인 편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내 감정을 우선시하진 않는다. 그래서 처음엔 사실 영국인들의 '돌려 말하기'가 그다지 단점으로 와닿지 않았다. 싹수없는 것보다는 예의가 바른 편이 훨씬 나으니까. 외국인으로서 홀대받기 유명한 다른 유럽의 나라들을 생각했을 때, 난 늘 영국사람들의 친절함이 좋았다. 그런데 런던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영국인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면서 비로소 그 '경고'가 어떤 의미였는지 와닿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That's very interesting"라는 표현이다. 직역하면 '그거 굉장히 흥미롭군!'인데 영국에서는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라는 것. 구글에 검색하면 정말 수많은 밈들이 존재할 정도로 유명한 예시 중에 하나이다.
많은 상황들에서 쓰일 수 있는데, 어떤 상황이나 말이 나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을 때, 내 기준에서 조금 이상한 것 같을 때, 뭔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정말 극단적으로는 회사에서 누군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을 때도 쓰인다. 영국 사람들은 격식과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누군가와 대립하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한다. 대놓고 '너 좀 이상해!'라고 할 수 없으니 빙빙 돌려 말해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듯하다.
또 다른 유사한 표현은 회사에서 사람들이 정! 말 많이 사용하는 "That's a good question"이다. 직역하면 당연히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이네'인데, 영국에서는 또 다른 뉘앙스를 가진 표현이다. 질문이 정말 좋다는 칭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질문이 본인의 예상 밖이어서 당장 대답하기 힘든 경우에 주로 사용한다. 예시로는 미팅을 하다가 누군가 꽤나 당황스러운 질문을 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를 때, Oh, That's a really good question. I think I can get back to you with that later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인데, 내가 나중에 대답해 줄게)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영국인들의 돌려 말하기 수법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듯하다. '영국-유럽 통역 가이드'라는 밈도 돌아다닌다. (아래 첨부) 물론 조금의 과장도 있겠지만, 남자친구가 어느 정도 맞다며 인정하기도 했고, 실제로 회사에서 꽤 사용하는 표현들이 많아서 아예 없는 말이 아님은 확실하다. 아니 이렇게나 다르게 이야기한다고? 싶을 정도로 정말 숨겨진 뜻이 어마어마하다.
나도 한국에서는, 업무의 효율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해 왔던 사람이고, 일을 하다 보면 가끔은 언성이 높아질 정도로 서로 다 까놓고(?) 커뮤니케이션했었는데 이렇게 지나치게 "예의 바른" 영국인들 사이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은 저 사람이 하는 말이 과연 진심일까 싶을 때도 있고 매니저가 칭찬을 해줘도 과연 진짜 칭찬일까?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좋은 점을 꼽자면, 한국과는 다르게 회사에서 '대놓고' 얼굴을 붉힐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일하다가 상대방 때문에 화가 나고 답답하더라도 앞에서는 죽어라 웃으면서 'Thanks for your support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동료들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물론 영국에서도 '사바사'여서 회사에서도 굉장히 직설적인 사람들이 있긴 한데, 그 사람들은 종종 무례하다거나 어울리기 힘들다는 평가를 듣곤 한다.
연애에서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 남자친구는 그래도 조금 덜 돌려 말하는 편(?)에 속하고 적어도 나한테는 솔직하게 감정을 다 오픈을 하는 편이라 성향적으로 아직까지는 크게 부딪힌 적은 없지만, 아주 가끔은 너무 예의 바른 그의 행동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한 번은 새로 오픈한 파스타집에 간 적이 있는데 정말 이게 무슨 맛인가 싶을 정도로 기괴한 파스타가 나왔다. 남자친구는 군말 없이 잘 먹길래 내 입맛에만 이상한가 보다 했고, 심지어 계산을 하고 나가면서 점원이 음식은 어땠냐라고 묻자, 'It was great, thanks! Have a lovely evening! (괜찮았어요.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라며 남자친구는 해맑게 인사까지 했다. 나중에 내가 넌지시 '근데 파스타가 좀 특이했다'라고 운을 띄웠더니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굉장히 영국식으로 얘기했구나 싶다.) 그제야 'Oh it was terrible (최악이었어)'라고 하는 것이다!! 왜 솔직하게 이야기 안 했냐고 하니, 그걸 굳이 이야기해서 서로 감정 상할 필요가 뭐가 있냐며 어차피 누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결과로 알게 될 것이라며 아주 무서운 얘기를 웃으면서 하길래 "와, 영국사람들 진짜 무섭다!!" 라며 그날 하루종일 "너 나한테는 그러면 안 된다"라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한 기억이 있다. 그 이외에도 분명히 뭔가 기분이 상한 것 같은데 괜찮다고 한다거나 (이 때는 정말 캐물어야 얘기해 주는데, 그래도 진짜 괜찮은지 아닌지 헷갈린다.) 본인이 원하는 게 있더라도 항상 내 기분을 먼저 살핀다거나. 가끔은 저렇게까지 배려 안 해도 되는데 싶을 정도로 예의가 발라도 너무 바르다. 그래도 내가 늘 뭐든지 솔직하게 오픈해서 그런지 남자친구도 그런 내 페이스를 잘 따라와 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문화에서 지내다 보니, 어느 정도의 "솔직 레벨"을 지켜야 할지 아직도 고민이고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 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최대한 솔직하고 정확해야 나중에 불필요한 오해가 없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도, 친구사이에서도, 연애를 할 때에도 빙빙 돌려 말해서 논점을 벗어나거나 결국 속에 담아두기보다는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더 건설적이라고 믿는 편이다.
영국인들의 이런 성향이 답답할 때도 많지만 대신 배운 점이 있다면, 지나친 감정소모는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 속에 힘이 있다고, 가끔은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는 것이 실제로 마인드 컨트롤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늘 돌려 이야기 하다가 속에서 천불 나고 싶지 않다.) 지나칠 정도로 상대방과의 대립을 피하는 영국 문화와 꽤 직설적인 한국 문화 사이에서 중간 지점을 찾는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솔직하게 커뮤니케이션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예의, 결국엔 내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그 스위트 스폿을 앞으로 잘 연구해 봐야겠다. 아무리 그래도 앞뒤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못 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