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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Sep 21. 2023

불편과 여유로움이 공존하는 곳

유러피언들의 여유로운 마인드의 비밀

한국에서만 살다가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면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도 느려터진 영국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에 하루에도 속이 천 번씩 뒤집어지곤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꼽자면 한국에서는 없던 여유가 조금 생겼다는 것이다. 우선 내가 런던에서 직접 겪었던 '불편함' 먼저 몇 가지 소개하려 한다. (인터넷이 느린 건 너무 당연해서 제외했다.)




교통

일단 영국의 지하철은 1800년대에 운행을 시작한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고 160년의 나이 탓에 굉장히 노후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런던 지하철을 처음 탄 사람들이라면 아마 한국의 지하철과 비교해서 매우 충격을 받을 텐데, 크기도 매우 작을뿐더러 일부 라인은 이러다가 청각을 잃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운행이 시끄럽다. 그래서 지하철 곳곳에 보수 공사가 자주 필요해서 갑자기 운행을 하지 않는다든가 역사 내에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 난다든가 하는 일은 아주 흔하다. 친구의 말을 빌리면 런던 지하철이 있을 곳은 정말 박물관이다...


게다가 '런던'하면 가장 악명이 높은 것은 바로 기차, 지하철 파업이다. 철도 노동자들의 임금, 다양한 근로조건 및 처우 개선을 위해 시작된 파업인데 매번 협상을 타결하는데도 지속되는 파업 소식을 들을 때면, 제발 그만해!!!! 를 속으로 외칠 수밖에 없다. 런던은 지하철이나 기차가 파업을 하면 정말 온 도시가 마비된다. 버스가 있긴 하지만 노선이 그리 효율적이지 않고 도시 내에 차도가 좁아서 자칫하다간 중간에 갇힐 수도 있다. 파업을 하는 주간은 회사에서도 미리 전면 재택을 하라고 공지가 내려온다. 그리고 작게는 친구들과의 약속부터 크게는 휴가 계획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면, 공항으로 가는 유일한 기차가 파업)


그 외에도 갑자기 아무런 공지도 없이 아침 운행 스케줄이 캔슬되어서 출근을 못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20분 정도 기다린 기차가 정차역을 거치지 않고 그냥 지나가서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이 What the fuck을 외친 적도 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택배

우선 아마존을 제외하고는 거의 평균 3일 이상의 배송 시간이 걸린다. 쇼핑몰에서 제공하는 기본 스탠더드가 3일에서 5일이다. 요즘은 Next day delivery를 하는 곳도 많아졌는데, 평균 5파운드 이상의 배송비를 추가로 결제해야 한다. 한국의 새벽배송, 당일배송은 아직까지 먼 나라의 이야기이다.


배송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사실문제도 아니다. 바로 택배를 받는 것 자체가 챌린지라는 것. 우선 우리나라는 주거형태가 대부분 아파트인 반면 여기는 1,2층짜리 주택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택배 기사가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서는 직접 사람에게 전달을 해야 분실 위험을 막을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택배 기사가 오는 시간에 집에 꼭 있어야 하는 불편함이 생긴다. 배송 예상 시간도 정확하지 않아서 사실 택배를 받는 날은 하루종일 집에 있어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어떤 택배 기사들은 가끔 수취인이 집에 있어도 체크하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배송일이 한없이 늦춰지거나 결국은 어딘가에서 직접 수령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심할 때는 그냥 문 밖에 택배를 두고 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생기는데, 여기는 택배 도난 사고가 정말 너! 무 많아서 그럴 때는 그냥 100% 분실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구입처에서도, 택배 회사에서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 포인트..

+ 실제 경험: 큰맘 먹고 비싼 신발을 주문했는데 저렇게 대문 밖에 끼워놓고 간 택배 기사. 결국 저 날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도중에 택배 찾으러 집에 왔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운 좋게 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한국에서는 인터넷 쇼핑을 정말 밥먹듯이 했었는데 이런 불편함 덕에 인터넷 쇼핑보다는 직접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구매를 하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소비가 많이 줄었다.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열쇠

처음에 런던에 와서 가장 신선했던 것은 사람들이 아직도 집 열쇠를 쓴다는 것이었다. 도어록의 편안함에 젖어있던 나는 열쇠를 매번 들고 다녀야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정말 어려웠다. 문제는 혼자 살 경우인데, 행여나 열쇠를 까먹고 집 안에 두고 나오면 나중에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리고 나는 툭하면 열쇠를 까먹었다. 부득이하게 문을 따야 하는 일이 생기면 Lock smith를 부를 수 있는데 70파운드 정도 부른다. 한순간의 실수로 10만 원이 날아가는 것. 그래서 열쇠를 지인들에게 뿌려두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 일을 처음 겪었을 때는 친구와 함께 살 때였는데, 친구도 마침 집을 비운 상황이라 오밤중에 창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 적도 있었고 (다행히 1층이라 가능했다.) 2층 플랏에 살 때에는 개인 방 문까지 잠글 수 있는 곳이었는데, 플랏 내부까지는 함께 사는 플랏 메이트 덕에 가능했지만 방 문은 결국 열 수가 없었다.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었지만 마침 집주인도 휴가를 간 바람에 무려 4일을 집에 못 들어가서 남자친구 집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열쇠가 없어서 집에 못 들어가는 상황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남자친구에게 왜 영국은 그 편한 도어록을 쓰지 않냐고 물어봤었는데 남자친구는 되려 도어록을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누가 비밀번호를 훔쳐보고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냐며.. 참나. 한국 사람들은 그런 상상조차 안 한다고!


서비스

영국의 대부분 CS는 챗봇이나 메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전화번호가 있긴 한데 말 그대로 안내 번호에 가깝고 직접 상담사와 통화가 되더라도 한국처럼 빠르게 연결되기 쉽지 않고 꽤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챗봇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정형화된 안내를 하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지 않은 서비스이고 메일은 기본적으로 며칠을 기다려야지 답이 온다. 한국처럼 전화 한 통으로 당장 해결을 해주는 데 익숙한 나는 가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한 번은 남자친구가 우리나라로 치면 한전인 British Gas와 중복 과금 문제가 생겨서 작년 10월부터 그들과 메일과 전화를 주고받았었는데 올해 7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해결이 되었다. 그동안 상대 쪽에 큰소리 한번 안내는 남자친구를 보고 정말 보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겨난 여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불편들 덕에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물론 여유 갖기의 첫 시작은 나의 멘탈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빨리빨리 이루어지는 한국과 비교하다 보니 너무 답답했지만 바꿀 수 없는 것들에 일일이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내가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점점 마음을 놓는 연습을 하게 되었고, '안되면 말고'의 마인드로 삶을 살다 보니 신기하게도 나도 점점 여유로워졌다. 예를 들면 런던 지하철에서는 인터넷은 물론 아무런 신호가 안 터지는데, 처음에는 뭘 해야 하나 답답했지만 지금은 적응해서 그 시간에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여유를 갖게 된 것처럼 말이다.


편리하지만 여유 없는 삶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한국에서 누렸던 편리함의 대부분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24시간 편의점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해야 하고, 새벽배송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밤새 짧은 시간 내에 주문을 확인하고 새벽에 배달을 해야 한다. 모든 고객들의 요청과 불만을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기 위해서 서비스 센터에는 늘 사람이 상주해야 한다. 이렇듯 편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삶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하고 희생했지만 너무나도 빠르게 돌아가는 나머지 '정신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곳. 어쩌면 그래서 편리 하지만 여유는 없는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불편하지만 여유 있는 삶

내가 지금까지 겪은 런던은 아직 불편함 투성이지만, 한국의 '빨리빨리'의 문화에서 유럽의 '그러려니'의 문화로 옮겨온 내 삶은 이전보다 훨씬 여유롭고 행복하다. 기차가 갑자기 캔슬되어도 아, 글 쓸 시간 더 생겼네 하고 넘어가기도 하고 회사에서 누군가 내 메일에 답장이 없어도 담당자가 퇴근했겠지 혹은 휴가 갔겠지 한다. 그리고 반대로 사람들도 내가 잠깐 멈추어도 '그러려니'하고 기다려준다. 가끔 예전처럼 조바심이 들 때면 잠깐 멈추고, 내가 지금 느끼는 이 성급함이 과연 정말 필요한 감정인가를 먼저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또 정신없이 빠르게 앞서나가려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국에서 30년 넘게 앞만 보고 살았는데 런던에 오고 나서야 옆도 보고 뒤도 보고, 잠시 멈추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 빠르고 편리한 삶보다는 어쩌면 불편하고 느리더라도 여유를 추구하는 이곳 사람들에게서, 삶의 중요한 무언가를 이루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멈춤'의 시간을 가질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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