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다양성' 이야기 1 - 섹슈얼리티(Sexuality)에 대하여
런던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멜팅 팟(Melting Pot)'의 도시이다. 말 그대로 정말 다양한 인종, 민족, 그리고 문화가 뒤섞여있다. 내가 영국으로, 특히나 런던으로 오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이 '다양성' 때문이었다. 모두가 비슷한 삶과 가치관을 추구하는 한국의 문화가 나에게는 늘 족쇄 같았는데 런던에서 지내면서부터는 이곳 사람들의 포용력과 다양성을 존중하고자 하는 노력들에 정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브런치를 통해 여러 가지의 주제로 영국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꼭 나누고 싶었고, 이번 글은 특히나 6월 Pride Month를 기념해서 영국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다. (*Pride Month: 성소수자 인권의 달인 6월을 가리키는 말)
한국에서는 주변에 성소수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몰랐고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10대의 나는 얼마나 무지했는지, 동성애는 그냥 건너 학교에서 들리는 '전설 같은' 소문 정도였고 그래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대학교를 여대를 가게 되면서 부끄럽게도 성소수자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되었고 학교 내 다양한 관련 커뮤니티와 여성학 수업을 통해 점점 성소수자에 대해 인지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약 4.5%는 성소수자라고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 20명 중의 1명은 성소수자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나라에 대입해 보면 약 233만 명 정도인데, 이는 대구광역시의 인구수에 육박한다고 한다. 단순히 '비이상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기엔 큰 숫자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점점 바뀌면서 한국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예전보다는 많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한국 포함 많은 아시아권 나라들의 성소수자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고 많은 편견들을 안고 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다르게 런던에서는 본인의 섹슈얼리티(*인간이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 사고, 감정, 가치관 등의 모든 것을 포함)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리고 사회 전반적으로 이를 지지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존중해 준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이곳에서는 로맨틱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여자친구(girlfriend)'나 '남자친구(boyfriend)'가 아닌 '파트너(partner)'로 지칭한다. 이는 성소수자 배려의 일환으로 그들이 좀 더 편안하게 느끼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기 위해서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볼 때 "Do you have a boyfriend/girlfriend? (여자친구/남자친구 있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Are you single? (싱글이야?)"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단어 하나만 바꾸었을 뿐인데 그 힘이 정말 강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상대방의 성별에 따라 "남자/여자 친구 있어?"라고 묻는 게 흔한데, 이곳에서는 상대방의 섹슈얼리티를 고려하지 않은 질문이기 때문에 꽤 무례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이성'을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에는 전 세계의 지사들을 포함해 다양한 커뮤니티(우리나라로 치면 동호회)가 있는데 "Pride" (성소수자들을 지지하는 커뮤니티)도 그중에 하나이다. 처음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행사가 6월 Pride Month를 축하하는 파티였는데 단지 소수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높은 직급의 임원들까지 참여한 규모가 굉장히 큰 행사였다. 외부 연사로 흑인이자 게이인 분이, Double Minority로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커리어를 계속 이어나가는 법에 대해 강의도 해주시고 (그는 현재 미국에서 아주 큰 회사의 임원이다.), 내부 특별한 연사로, 사내 꽤 높은 직급의 분이 양성애자로서의 자신의 삶과 그에 따른 고충을 공유했다. 마지막에는 행사에 참여한 직원들에게도 주변의 성소수자 동료들을 지지하고 응원해 달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열려있는 문화라고 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개인적인 이야기 하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들의 용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자 인사이트였다.
크게 성소수자들을 LGBTQ+ 로 지칭하는데 - Lesbian (레즈비언), Gay (게이), Bisexual (바이섹슈얼), Trans (트랜스젠더), Queer (퀴어)/Questioning(정체성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 - 이는 동성애자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성과 성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곳에서 취업 준비를 하면서 정말 많은 곳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모든 회사에서 공통적으로 물어보는 항목이 있었다. "Which pronouns do you use?" (당신은 어떤 대명사를 사용하십니까?)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답변으로는 He/Him(그), She/Her(그녀) 두 가지로 국한되지 않는다. They/Them(그들), Something else(또 다른 어떤 것)까지 옵션이 있다. 처음에는 왜 이 '당연한' 것을 물어볼까 했는데 역시나 이들이 쓰는 대명사에도 당연한 것은 없었다. 이것도 생물학적 성에 따라 '그' 혹은 '그녀'로 불리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 (예를 들면 본인을 남자 혹은 여자로 구별하고 싶지 않은 Non-binary 들은 생물학적 성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대명사를 사용해 주길 원한다.)을 위한 배려이다. 상대방을 인터뷰를 할 때, 그리고 나중에 함께 일을 하게 될 때에도 그 사람이 원하는 대명사로 불러주는 것이 예의이다. 작은 것 하나라도 다양성을 존중하고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영국의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PRIDE' (한국에서는 '런던 프라이드'로 개봉)라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1980년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고, 영국의 동성애자 운동가들이 전국광산노동조합의 장기 파업 기간 동안 광부들을 돕는 이야기로 소외된 두 공동체가 뜻밖의 동맹을 맺어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 영화를 보면, 편견보다 강한 '연대'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인생 영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손에 손꼽히는 감동적인 영화였다.
영국도 열려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런던이 조금 특수 케이스라고 한다. 영국에서 동성결혼이 비로소 합법화된 건 2013년이라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고 아직도 일부 지역은 굉장히 보수적이라고... 그래도 Slowly but surely, 세대가 바뀌면서, 그리고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사회의 전반적인 노력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 영국에서는, 6월 Pride Month를 기념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성 소수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행보를 응원한다. 기업에서는 1년 중의 큰 마케팅 수단 중의 하나로 관련 상품을 출시하기도 하고 관련 프로모션, 그리고 브랜드 로고를 무지개로 바꾸기도 한다.
그 어떤 나라도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PRIDE'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국에서도 아주 예전부터 많은 성소수자들이 편견과 핍박을 받아왔고 그 와중에도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주변의 끊임없는 지지가 있었다. 이런 노력이 모여서 오늘날처럼 모두가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았을까?
난 지난주에도 남자 동료가 새롭게 하고 온 네일과 메이크업을 칭찬했다. 그에게 정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이 이상한 사람들로 치부되는 것이 아닌, 그들을 배척하는 이들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들이 되는 사회.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그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바라보면 사실 굉장히 쉽다. '편견'을 '연대'로 바꾸면 세상은 금방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