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다양성' 이야기 3 - 숨겨진 이면
정말 영국은 모든 면에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나라일까? 정답은 Yes와 No이다. 영국에서 이야기하는 '다양성(Diversity)과 '포함성(Inclusion)'은 애석하게도 나 같은 유색 인종 이민자에게는 종종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런던'의 다양성과 '영국'의 다양성
나는 런던에 산다. 런던은 정말 다양한 문화, 인종들의 사람들이 뒤섞여있는 멜팅 팟의 도시이다. 지난 글에도 언급했듯이 런던에 사는 사람, 즉 런더너(Londoner)에는 뚜렷하게 떠오르는 정의나 고정관념이 없을 만큼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도시이다. 런던에서만큼은 내가 이질감이 든다는 생각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생각은 런던에서 조금만 외곽으로 벗어나도 달라진다.
런던에 사는 '백인 영국인'의 비율은 36%이다. 영국인이 아닌 백인까지 합치면 54%까지 올라가지만 그래도 나와 같은 '백인이 아닌 그룹'이 46%나 차지한다. 런던의 어딜 가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런던이 아닌 도시에 가게 되면 (특히 소도시) 놀랍게도 길을 걸어가는 동양인은 나 밖에 없다는 것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외국인 학생 비율이 높은 큰 학교가 있는 도시나 맨체스터나 버밍엄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서는 백인 비율이 월등하게 높다. 영국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영국에 살고 있는 81.7%가 백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국에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민온, 특히 유색인종의 이민자들은 종종 이런 주류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일부는 언어장벽, 문화차이에 직면하기도 하고 대놓고 겪는 차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차별과 늘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인종차별을 겪은 적이 있냐는 질문엔 나는 늘 '있다'라고 대답한다. 미디어에서 종종 보도되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인종차별은 (운이 좋게도)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보이지 않는 '은근한 차별'은 일상에서 늘 느끼고 있다. 예시를 들고 싶은데 딱히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은근하고 애매해서 이게 차별이 맞나 싶은 헷갈리는 경험들이 대부분이다.
브렉시트의 진짜 의미
영국의 '브렉시트(Brexit)'를 통해 영국 사람들이 이민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그동안 해왔는지 예상할 수 있는데, 브렉시트야 말로 이민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브렉시트를 찬성 혹은 반대하는 이유는 개인과 지역 사회마다 달랐지만, 주요 화두는 이민자들과 정부의 이민 정책이었다.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점은, 영국이 EU를 떠남으로써 EU 시민들의 자유로운 입국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이민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영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이고 그 다양성을 존중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결국은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영국인들 사이엔 '우리'와 '그들'이라는 명확한 바운더리가 존재하는 듯하다. 다른 인종 혹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해 '인정'은 하지만, 그 사람들이 주류 사회에 적응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노력은 굳이 하지 않는 것. 결국 주류 사회에 들도록 노력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이방인들인 셈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영국뿐만이 아니라 이민자가 존재하는 나라라면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편견의 장벽
이곳에서 내 소개를 하면 보통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이 아니라 일을 하는 직장인이라는 것, 그리고 아시아 마켓을 담당하는 것이 아닌 영국/유럽 마켓 팀 소속에서 영국의 굵직한 기업들을 담당한다는 것에서 말이다. 조금만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면 다양한 업계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 텐데.. 모두 동양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반응이다.
내 남자친구는 백인 영국인이고 백인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 나고 자라 주변의 모든 친한 친구들도 다 백인이다. 사귀기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남자친구의 친구들 모임에 나갔는데 20명 정도 되는 백인 영국인들 사이에 나 혼자 동양인이어서 나도 모르게 괜스레 그 자리가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많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몇몇 절친한 친구들과는 자주 봐서 친해졌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내 남자친구의 파트너가 아니었더라면 그들과 내가 자연스레 만나서 진짜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확률은, 직장 동료가 아닌 이상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 친구는 내가 처음이라는 것을 보면 애석하게도 그들은 '백인 영국인'이 아닌 다른 커뮤니티와 가까워질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쪽이 더 맞겠다.
그만큼 이곳에서는 특히 인종이나 문화권으로 나뉜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강하고 그 장벽이 꽤나 높은 듯하다. 그렇다 보니 나와 자연스럽게 친해진 친구들은 백인이 아니거나, 백인이더라도 영국인이 아닌 외국인들이다. 백인 영국인 친구들은 몇 안되는데, 회사에서 친해진 동료 거나 남자친구를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이다. 물론 열린 마음을 가진 영국인들도 많다. 그들은 대부분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문화에 관심이 많거나 이미 여행, 해외 근무 등의 경험을 통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 사람들이다.
이방인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인드
이런 이중적인 분위기에서 우리 같은 이방인들이 할 수 있는 행동, 혹은 가질 수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사람을 만날 때, 어떤 특정한 고정관념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 같다. (물론 나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편견들이 있다.) 이미 우리들은 익숙한 삶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위해 큰 변화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누구보다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생활에 지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한 한국인들과만 어울리기 쉬운데 그건 또 굉장히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영국인 남자친구를 통해서 영국의 문화, 영국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을 가까이에서 배우고 체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팀은 국적이 정말 다양한데, 가끔 동료들과 각자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신선하고 재밌는지 모른다. 물론 한국 친구들에게만 느낄 수 있는 깊은 유대감과 코드, 한국인만의 감성도 정말 소중하다. 지금은 감사하게도, 둘 사이의 적절한 발란스가 나의 런던 생활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정말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처음엔 나도 막상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에 주눅이 들고 자신감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곳 주류 사회에 들기 위해 과하게 애쓸 필요도, 그렇다고 벽을 쌓은 채 배척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영국인이건 외국인이건, 동양인이건 흑인이건 백인이건, 편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나'라는 사람을 그 자체로 받아주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그 사람들과 잘 지내면 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박막례 할머니의 명언처럼, 남한테 장단 맞추지 말고, 북 치고 장구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알아서 와서 춤출 것이다. 런던처럼 이런 축복받은 환경에서, 특정 커뮤니티 안에서만 갇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내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타국에서 이민자,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말처럼 정말 쉽지 않지만, 한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다양성을 배움과 경험의 기회로 이용하면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인사이트를 매일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