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달라도 너무 다른 영국 직장생활 이야기 1
영국에 와서 아직도 고전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직장 문화. 한국에서만 7년의 직장생활을 한 나에겐 이곳의 직장 문화는 적잖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근태
출퇴근시간
입사 첫날 월요일. 인사팀에서는 월요일은 대부분 모두 재택근무를 하니 절대 사무실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팬데믹 덕분에 재택근무가 일상화된 것은 영국도 마찬가지.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입사 첫날을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나에겐 그 당시엔 꽤 문화 충격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화요일, 떨리는 마음을 가득 안고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9시부터 근무니까 최대한 일찍 도착해야지 하며 일찍 나왔는데도 예기치 못하게 지하철이 연착이 되는 바람에 무려 5분 정도 늦을 위기였다. 첫 출근부터 늦어서 찍히는 상상에 눈썹 휘날리듯 달려서 9시 3분에 도착한 사무실. 이게 웬걸,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무실엔 정말 아무도 없었다. 날짜를 착각했나 싶어서 캘린더를 들여다봤지만 분명히 약속한 출근일이 맞았다. 그러다 9시 20분 즈음부터 서서히 사람들이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노트북을 켜지도 않고 바로 커피를 가지러 가거나 아침을 먹으러 갔고, 10시쯤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은 전 세계 팀원들과 시차를 맞추느라 미팅 시간이 당겨져 오전 9시에도 미팅을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하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처음에는 5분 정도 지각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매니저에게 일일이 보고를 했는데, 지금은 뭐, 그냥 그러려니 한다.
퇴근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회사는 9 to 6인데, 한국에서 야근이 일상이었던 나에게는 6시 땡 하면 칼퇴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더군다나 개인의 재량으로, 5시에서 6시 사이에는 자유롭게 퇴근하는 분위기이다. 재택근무를 하면 보통 월요일, 금요일을 선택해서 하는데 그러다 보니 목요일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피스로 출근을 하고, 그래서 목요일은 영국에서 금요일 같은 존재이다. 목요일엔 가끔 5시부터 동료들 따라서 펍에 맥주 마시러 가는 경우도 많다. 몸이 안 좋거나 집에 사정이 있어서 그것보다 더 일찍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금요일은 더 심하다. 오후 3시만 넘어가면 사실 암묵적으로 모두가 일을 끝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자체적으로 주 4일제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아, 이게 바로 듣기만 하던 유러피언의 직장 문화인가' 싶었다.
한국에서는 6시 퇴근인데 7시에 집에 간다고 상사가 '오늘은 일이 없나 보네?' 라며 눈치를 준 적도 있었고 9시 딱 맞춰서 도착한다며 일찍 좀 다니라고 한 상사도 있었다. (둘 다 다른 사람)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는 왜 그렇게나 근태에 목숨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지각을 하건, 예상보다 일찍 퇴근을 하건 주어진 본인 일만 잘하면 되는데 말이다. 확실히 영국의 직장생활은 '근태'와 관련해서는 개인에게 자율성을 충분히 부여하고 선택을 존중하는 분위기이다.
휴가와 병가
영국의 연차는 기본 25일이 주어진다. 영국의 공휴일이 8일임을 감안하면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은 15일 공휴일, 15일 연차) 한국에서는 가장 길게 쓸 수 있는 휴가가 5일이었고, 혹여나 '황금연휴'라고 해서 명절이나 공휴일에 붙여서 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농담으로 길게 휴가 다녀오면 책상이 빠진다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영국에서는, 주어진 휴가 개수 내에서는 어떻게 쓰건, 얼마나 쓰건 정말 개인의 자유이다. 물론 2주 이상의 휴가는 매니저의 별도 승인이 필요하긴 한데 미리 이야기만 한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이다. 덕분에 올해 4월에 1.5주 연차, 1.5주 재택근무로 승인받고 한국에 3주나 다녀올 수 있었다. 재택근무가 가능하다 보니 여행을 가더라도 일만 할 수 있으면 장소는 전혀 상관없다.
병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몸이 안 좋으면 개인 연차를 쓰고 쉬거나 병원에 가야 했고, 필요한 경우에는 진단서까지 제출해야 했는데 여기서는 오전에 미리 인사팀과 매니저에게 알려만 주면 쾌차할 때까지 맘껏 푹 쉴 수 있다. 증빙 서류는 필요 없고 당연히 유급이다. 한국에서는 아프면 가끔 눈치도 보였는데, 여기선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지도 묻지 않는다. 아프면 그냥 당연히 쉬는 것이 이곳의 문화이다.
성과와 승진
영국은 근태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을지 몰라도 업무 성과에 대한 평가는 확실하게 한다. 우리 회사 기준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팀이 아닌 개인별로 아주 디테일하게 KPI가 주어진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내가 소속된 팀/브랜드의 전체 매출이 목표였다면 이곳에서는 팀 매출도 물론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나에게만 주어지는 타깃 매출과 포트폴리오가 따로 있다. 팀 전체 매출을 달성하더라도 개인 목표가 부진하면 혹독한 피드백과 평가가 주어진다. 매니저와 매주 화요일, 1:1 미팅을 하면서 매출과 관련해서 함께 리뷰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진다. 개인 매출이 빠지는 날에는 피드백 지옥에 갇힐 준비를 하고 미팅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앞으로 어떻게 부진한 매출을 메꿀 것인지에 대한 팔로업까지 필수다. 한국에서는 성과 리뷰라고 해봤자 1년에 1-2번 정도 형식적으로 한 게 다였는데 여기는 성과에 대한 소통과 피드백이 확실하다. 한국에서는 사원, 대리 시절을 거치면서 목표를 관리하기보다는 사실 실무를 쳐내기 바빴고, '팀'이라는 공동체에 묶여있다 보니,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서 그런지(?) 목표 달성에 대한 스트레스나 부담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는 실무도 쳐내라, 개인 목표도 관리하랴 정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국 직장 문화에서 받던 스트레스가 영국의 업무 스트레스로 모두 몰린 기분이랄까.
그래서 영국의 승진/평가 시스템은 꽤 잔인하다.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대기업에서는, 어느 정도 시간을 버티면 '고과 대상자'로 선정이 되어서 자동으로 승진을 시켜주었다. 그 말인즉슨, 아무리 성과가 좋아도 고과 대상자가 아니면 승진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아직도 첫 회사 첫 성과 리뷰에서 팀장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수현아, 너 이번에 정말 잘해서 마음속으론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데, 난 너에게 C를 줄 수밖에 없어. 다음에 고과 대상자 되면 챙겨줄게". 회사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이유로 더 낮은 점수를 준다니. 지금 생각하면 정말 황당한 말이다. 영국은 그 반대다. 성과를 내는 사람에겐 시간 상관없이 '승진'과 '연봉 인상'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날개를 한번 펴 보지도 못하고 회사에서 도태되거나 결국엔 해고당한다. 우리 팀 동료 중에 A는 인턴 기간을 포함해서 사회생활을 시작 한 지 이제 3년 차인데, 그동안 승진을 2번이나 했고 지금은 Senior Manager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입사한 지 5년이 된 B는, 5년 동안 직급도 그대로, 연봉도 그대로였다. 당연히 팀 내에서 A와 B에 대한 피드백은 상반된다.
이런 분위기가 성과 달성에 대한 부담감을 안겨주지만, 다르게 이야기하면 확실히 열심히 할 동기 부여가 된다. 승진하기 위해 회사에 단순히 '존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를 잘 내면 나에게 그만큼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이니까. 나도 이제 회사에 들어온 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내년 승진과 연봉 인상을 목표로 지금 정말 "work my arse off" 하고 있다. 지난 쿼터 리뷰 때 승진에 관심이 있다고 매니저에게 넌지시 이야기도 했고, 가장 중요한 이번 Q4 쿼터를 잘 마무리하고 1월 Yearly 리뷰 기간에 다시 한번 어필해보려고 한다. 영국에선 나를 잘 포장하고 드러내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이 이야기는 직장 생활의 핵심이 되는 주제로 다음 글에서 더 자세하게 다뤄보겠다.
하이브리드 한국인
한국에서 7년간 이미 베여버린 습관(a.k.a '노예근성')을 버리는 것은 지금도 나에게 가장 큰 숙제이다. 그래도 영국에 와서 근태에 대한 스트레스는 정말 많이 사라졌다. 바쁘지 않은 날에는 6시 전에 퇴근도 하고, 혹여나 야근을 하게 되면 그다음 날 그만큼 일찍 퇴근한다. 아프면 과감하게 하루 쉬고, 휴가를 가고 싶을 땐 눈치 보지 않고 연차를 쓴다. 그런데 한 가지 꼭 지키는 원칙이 있는데, 웬만하면 지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10분이라도 일찍 출근을 하는 것이 미덕인 곳에서 지내온 세월 때문인지, 아무리 근태에 여유로운 분위기여도 지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이사하고 나서 요즘은, 사무실에 15분 정도 일찍 와서 커피를 내려먹고 가끔은 아침도 먹으면서 남들보다는 조금 여유로운 아침을 보내는데, 장점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선 팀보다 개인을 더 중시하는 성향이다 보니 가끔 이곳 사람들의 너무 개인적이고 과하게 자유로운 업무 방식이 답답할 때도 많다. 그래도 나는 팀플레이에 이미 최적화된 한국인이기 때문에 늘 팀의 화합, 내 개인의 이익보다는 팀을 그래도 먼저 생각하게 된다. 동료들이 도움을 청하면 성심 성의껏 도와주고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은 R&R을 따지기 전에 효율을 위해서라도 일단 하고 본다. 내가 조금 더 일을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팀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흔쾌히 한다. 그래서 생기는 억울한 일도 종종 있지만, 그냥 이게 내 방식인데 뭐 어쩌겠어라는 마음이다. 덕분에 올해 동료/임원들이 추천한 '이달의 직원' 상도 받았고, 내가 매니징 한 이후로 브랜드가 크게 성장했다며 UK/EU 지역의 첫 클라이언트 Case Study 인터뷰도 따냈다. 고맙게도 나의 그런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마냥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업무에 있어서 한국인에 대한 평판이 괜히 좋은 게 아니다. 뭐든지 열심히 하고 또 뭐든지 잘하는 한국인이, 영국 직장 문화의 '융통성'까지 가지는 하이브리드형 인재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을까? 내가 얼른 그런 예시가 되어서 한국인의 우수함을 널리 널리 알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