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달라도 너무 다른 영국 직장생활 이야기 2
영국 직장 생활에서 '겸손함'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에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배우는 가장 중요한 미덕중에 하나이지만 영국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가치관이다.
겸손의 미덕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시험을 꽤 잘 보았는데도 친구들에게는 괜히 '아 아니야 별로 못 봤어'라고 얘기를 한다던가, 회사에서 좋은 성과를 이루었을 때도 내가 잘해서라고 얘기하기보다는 늘 '운이 좋아서', '여러분들이 도와주신 덕에' 등의 미사여구를 붙이곤 한다. 누군가에게 칭찬이라도 들으면 우리는 고맙다는 말 대신 손사래를 친다. 한국인들은 남을 칭찬하고 치켜세우는 것은 정말 잘하지만 '자기 자랑'에는 영 소질이 없다. 스스로에겐 한없이 엄격하고 오히려 남들에게 잘난 체 한다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 더 뒤로 숨어버린다.
넌 존재감이 너무 없어 vs 나대지 마
우리 회사는 매일 아침에 30분씩 전체 미팅을 하는데 팀 내 이슈나 업데이트가 있으면 서로 공유하고 문제가 있으면 다 같이 해결하자는 취지이다. 요일마다 담당 팀이 있고 수요일이 내가 속한 '광고주 팀' 날이다. 입사하고 나서 초반에 전형적인 한국인 마인드였던 나는, 정말 모두가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면 회의 시간에 굳이 나서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다른 동료들이 자신의 의견들을 활발하게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굳이 나서서 흐름을 끊고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보다는 경청하는 방향을 택했다고 할까? 목소리를 키우기보다는 묵묵히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첫 쿼터를 성공적으로 보내고 첫 성과 리뷰에서 매니저에게 받은 피드백은 정말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일을 정말 잘하고, 나를 뽑은 것이 본인이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라던 그녀는, 그에 비해 내가 너무 존재감이 없다며 회사 내에서 공공연하게 나를 좀 더 자랑하고 내세우라는 것이었다. 오전 팀 미팅 때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얘기하고, 다른 동료들처럼 본인이 잘한 일에 대해서는 회사 전체 메신저에 자랑이라도 하라고 했다. 그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피드백이었다. 그리고 그 평가가 더 당황스러웠던 이유는, 한국에서는 완전 정반대의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 오기 전, 연차가 쌓이면서 프로젝트를 리딩하며 커리어에 자신감이 붙었던 때, 회의 시간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의견도 내고, 높은 직급의 사람들에게까지 전사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곤 했었다. 그런데 당시 직속 팀장님은 그게 별로 마음에 안 드셨는지, 회사 사람들이 안 좋게 볼 수도 있으니 나에게 당분간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한마디로 '나대지 마라'는 암묵적인 경고였다.
매 순간을 리드하는 사람
내가 일하고 있는 어필리에이트(Affiliate) 업계는 디지털 마케팅 범주 안에 속하지만 사실은 다른 채널들과는 굉장히 다른 특징을 가진다. 어필리에이트는 광고주, 퍼블리셔와 더불어 그 둘 사이를 이어주는 네트워크, 그리고 에이전시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협업해서 합을 잘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숫자보다는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네트워킹이 훨씬 중요한 업계이다. 나의 업무의 90%는 광고주들, 그리고 퍼블리셔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래서 매일 미팅, QBR을 포함한 프레젠테이션, 클라이언트와의 식사, 컨퍼런스 등에 거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는다. 매니저는 그때마다 나에게 늘 '그 순간을 리드하는 사람이 돼라'라고 했다. 그 자리가 어디건, 어떤 직급의 사람이 있건, 내가 나서서 주도하고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받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한 번은 아주 중요한 광고주를 위해 오피스에서 퍼블리셔 행사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그 광고주만을 위해서 모든 중요한 퍼블리셔들을 초대하고, 식사 대접까지 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이벤트 초기 기획부터 20명이 넘는 인원 스케줄 조율도 다 끝내고, 엄청 발품 팔아 예약한 레스토랑도 광고주 모두가 훌륭하다며 극찬했다. 그리고 미팅에서는 최대한 조용히 앉아서 팔로업 할 부분들에 대한 노트를 받아 적었다. 중요한 행사다 보니 양측에서 꽤나 높은 직급의 사람들이 참석했고, 나는 광고주와 퍼블리셔의 중간 다리 역할이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행사가 다 끝나고 마음을 놓기도 전에 나를 조용히 불러낸 매니저는, 내가 전반적인 행사를 주체적으로 리드하지 못했고 또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며, 클라이언트와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실망스럽다는 혹독한 피드백을 주었다.
한국이었다면 어떤 피드백을 받았을까? 아마 물 흐르듯 아무 문제 없이 잘 마무리한 것에 높은 점수를 받았을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는 내가 매 순간 미팅을 리드하지 못했고 조용히 있었다는 이유로 실망스러운 행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겸손 한 스푼 덜고 뻔뻔함 한 스푼 더하기
그 피드백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나는, 그때부터 조금씩이라도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한국의 겸손함은 이곳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오전 미팅에서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노력했다. 최소한 할 말이 없으면 동료의 말에 질문이나 피드백이라도 했다. 그랬더니 동료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내가 원래 말 없고 소심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고 왜 여태 숨겼냐며. 숨긴 게 아니라 그냥 니들 말 경청한 건데... 괜히 억울했다. 그리고 광고주로부터 중요한 딜을 따내거나 공유할만한 좋은 일이 생기면, 무조건 팀 슬랙 채널에 공유했다. 그랬더니 매니저도 만족스러운지, 이제 좀 여유로워 보인다고 앞으로 지금처럼만 하라고 했다. 이제 이 회사에서 일을 한 지도 1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겸손'을 덜어내고 그 빈자리를 좀 더 (정제된) '뻔뻔함'으로 채우려 노력했더니 작게나마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이젠 과하지 않은 수준의 자기 자랑 정도는 쉽게 하는 편이다.
그래도 나는 '겸손함'이 버려선 안되는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일하며 느낀 점은, 이들은 본인이 할 말에 집중하다 보니, 자기 PR은 굉장히 잘하는데 대신 남의 말을 경청하고 의견의 화합을 이루는 것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겸손을 장착한 한국인, 그리고 사실 비슷한 아시아 문화권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에 경청을 굉장히 잘하고, 그러다 보니 합의점에 빨리 다다른다. '나'의 존재감보다는 '우리'의 화합에 집중하려는 성향 덕인 것 같다.
아직까지도 나는 이곳 동료들에 비해서 많이 조용한 편이고,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일,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더 우선순위를 두는 쪽이지만,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는 확실히 나를 좀 더 드러내는 데 익숙해진 느낌이다. 아직도 목소리 큰 사람들을 만나면 피곤하고, 내가 한 일에 대해 넌지시 크레딧을 가져가려는 사람들을 보면 화도 나지만, 그럴 때일수록 흥분하지도, 가만히 있지도 말고 똑똑하게 내 실속을 더 챙기는 법을 수련하고 있다. 서양 문화권의 '자기 어필'과 동양 문화권의 '겸손' 그리고 '경청' - 그 두 가지의 성향을 잘 섞어보면 그게 또 이곳에서 나만의 강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