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톡 런던살이 근황
지난 멘붕의 이직 후기 글을 쓴 이후 또 3개월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러다가는 그동안 열심히 일궈놓은 브런치 커뮤니티를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연말이 된 겸 구독자 분들에게 최근 틱톡에서의 나의 근황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오징어 게임 참가자
틱톡에서의 6개월은 아마 내 인생에 가장 긴 6개월이 아니었을까 싶다. 6개월이 아니라 1년은 훌쩍 넘은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동료들이 말하길, 바이트댄스(틱톡의 모회사)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체감 기간이 실제 재직 기간에서 3을 곱하면 된다고. 무슨 강아지 고양이 인간 나이 계산법도 아니고.. 어찌 됐건 경험해 본 바로 꽤나 신빙성 있는 말이다. 지난 글을 쓴 이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수습 종료를 불과 1.5개월 앞두고 말이다. 짧게 말하자면, 나를 뽑아준 두 명의 상사가 모두 결국 팀을 떠났다. 면접에서 나를 선택해 주고, 그동안 내 성장을 지켜봐 준 매니저와 팀의 리더가 떠났다는 사실은, 곧 다시 출발선에 선다는 의미였다. 그 자리를 대체한 새로 온 리더에게 또다시 나를 증명해야 했다. 더군다나 예전 매니저와 리더 둘 다, 팀을 떠나기 전에 나에게 수습 통과와 더불어 여러 가지 주요 프로젝트들을 맡기겠노라 약속했었는데, 모든 것이 리셋이 되고 나의 운명은 나를 전혀 모르는 새로운 리더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남은 수습 기간 동안 자칫해서 괜히 새로운 리더 눈 밖에 난다거나 나의 역할을 증명하지 못하면 수습 통과가 안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매일매일 불안에 떨며 지냈다. 그리고 가끔 알게 모르게 타 팀의 정리해고 소식이 계속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내 신분이나 직업 안정성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영국에 와서는 늘 신분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고 특히 틱톡에 오고 나서는 매일매일이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가 된 기분이었다. 빅테크에 다니면 원래 이런 걸까? 모두가 그냥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쁜 게임 참가자로 보였다. 그래도 슬퍼하거나 흔들릴 여유도 없었다. 우선 수습 기간을 무사히 잘 버텨내기로 마음을 먹었고 지난 10월 말, 드디어 수습 통과를 했다.
생존력 만렙이 되다
영국에 오고 나서, 특히 틱톡에서 배운 것 중에 하나는,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 섣불리 안심하지 말고 결국 끝까지 나를 지켜줄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이었다. 남은 한 달 반 동안 내가 했던 일은 조용히 버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와 필요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새로운 리더와 꾸준히 일대일로 만나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보여줬다.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다가가서 계속 귀찮게 하기도 했다. 열심히 일만 해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결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서서히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수습 통과 할 때, "You are very smart. I have a high expectation of you" (넌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야. 기대가 굉장히 커)라는 굉장히 기분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 수습이 끝난 이후에도 나에게 이것저것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시켜보던 리더는, 이제 나의 업무 스코프를 점점 넓히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신규 크리에이터 온보딩 담당이 내 업무의 주를 이루었다면 이젠 크리에이터 인큐베이션, 교육, 그리고 커뮤니티 빌딩하는 것 까지도 조금씩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만큼 일이 많아졌다는 소리...) 지난 글에서 빌런이라고 칭했던 사람도 지금은 어느 정도 내 편이 되었다. 그동안 그녀의 성격과 업무 스타일을 대략 파악 해본 결과, 적대적으로 대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맞춰주면서도 잘 구슬리고 내 쪽으로 유리하게 만드는 쪽이 낫겠다 싶어서 전략을 바꿨더니 처음보다 관계도 훨씬 많이 나아졌다. 얼마 전에는 내가 주도적으로 작성한 2025년 리뷰 자료가 팀 내에서 가장 종합적이고 깊이 있고 전략 방향도 명확하다며, 별도 피드백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했다. (원래 굉장히 디테일한 것까지 마이크로 매니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여전히 그녀는 우리 팀의 빌런이고 가끔 속에서 열불이 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이곳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잘하는 일, 그리고 주어진 역할 열심히 하면서도 나만의 바운더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틱톡에서 생존력 만렙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에게 필요한 조각들
예전엔 회사가 맞지 않거나 업무가 지루해지면 이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렇게 영국까지 오게 됐고, 테크로 커리어를 전환해 틱톡까지 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다음 목표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져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팀과 회사에 꽤나 잘 적응해가고 있는데도 직장 생활이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삶은 아니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진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AI 시대 같은 뻔한 이유는 빼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제 회사라는 조직에서만 커리어를 쌓기엔 할 줄 아는 게 너무 많아졌다. 24살에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10년 넘게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경험을 쌓았더니, 꽤 다양한 것을 잘하는 올라운더가 됐다. 게다가 나처럼 한국, 영국, 유럽 시장을 모두 경험해 본 사람은 드물다. 물론 그 경험들 중에서도 적성이나 취향의 차이는 있었지만, 여러 번의 이직과 직무 전환을 겪으며 깨달은 게 있다. 나한테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려면 결국 나를 위해 일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고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가기엔 현실적인 장벽이 많다. 당장 취업 비자를 내팽개칠 수 없을뿐더러 틱톡에서 비자 비용을 부담해주고 있어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도 3년 후 영주권을 딸 때까지는 다닐 생각이다. 솔직히 틱톡에서 일하는 거 진짜 힘들고 힘들다. 하지만 동시에 재밌고 배울 게 정말 많다.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플랫폼이자 모든 트렌드가 모이는 곳이니까. 그래서 틱톡에서 할 수 있는 데 까지는 해볼 생각이다. 틱톡은 지금 공격적으로 이커머스를 확장 중이고 내부 기회도 많아서, 기회가 되면 내가 더 재밌게 잘할 수 있는 쪽으로 부서 이동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지금 하는 일은 퍼포먼스, 그로스 마케팅에 가깝고 크리에이터 비즈니스를 담당하고 있는데, 솔직히 틱톡을 벗어나면 활용하기가 어려운 경험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회사를 떠나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커리어 방향으로 다시 계획해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생의 모든 경험은 점을 잇는 것 (connecting dot)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나중에 돌아보면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조각들이지 않을까.
그래도 난 럭키비키니까!
내가 제일 못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나에게 관대해지는 것이다. 꾸준히 나를 채찍질해서 그걸 동력 삼아 늘 뭔가를 이뤄왔는데, 그러다 보니 가끔은 내가 가진 좋은 점들을 미처 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영국에 온 지 벌써 4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동안 이룬 게 정말 많다. 오랜 시간 패션 업계에만 있던 내가 테크업계로 커리어를 바꿨고, 런던에서 남부럽지 않은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그것도 2년짜리 워홀 비자로 바닥부터 시작해서 현지 경험 없이 영국 취업에 성공했다. 어느 날 유학을 하고 현지 회사에 정착하고 사는 친한 친구가, 비싼 유학 없이 그 큰 회사에 취업한 게 정말 대단하다고, ROI가 정말 높은 사람이라 해서 그 말에 웃음이 터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년에는 이렇게 완벽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꿈꾸던 파트너를 만나서 결혼도 한다. 그래, 그동안 정말 알차게 잘 살았구나..! 누구보다 열심히 살기도 했지만, 운도 잘 따라 줬던 것 같다. 오늘은 그동안의 부정적인 생각들 잠시나마 다 떨쳐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글도 쓰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여기까지 온 나 자체가 충분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만큼은 "난 정말 럭키비키잖아! 를 세 번 외치고 잘 생각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인정해 주는 날들이 쌓이면 분명 더 단단해질 거라고 믿는다.
제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즐거운 성탄절,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 바라요! 오랜 방황 끝내고 마음 단련 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더 글 자주 쓰겠습니다! :)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