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살이에 대한 솔직한 생각

해외생활을 힘들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

by 오후세시

요즘 뉴스는 물론이고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 영국에 대한 콘텐츠들이 정말 많다. 영국의 불안정한 경제, 정치, 인종 차별, 범죄 소식, 생활고 등 대부분은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나도 영국에 실제로 사는 사람으로서 공감 가는 부분들이 물론 있다. 이번 글은, 30년 살던 한국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 지 만 4년이 된, 런던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솔직한 생각 나눔이다.


실제로 체감하는 것들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처음 와서 취업 비자를 받고 영국에 정착한 지 만 4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 정말 열심히 살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운도 많이 따라줬다고 생각한다. 요즘 영국의 실업률은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청년 실업률은 16% 이상이라고 하는데, 대졸자 8명 중 1명은 백수라는 소리다. 게다가 요즘은 이민자 수 줄이기에 혈안이 된 정부 탓에 워킹 홀리데이는 물론, 현지 유학 후 졸업 비자 2년으로도 취업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다. 취업 비자를 받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예전에는 적극적으로 "워홀 오세요"라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솔직히 이제는 쉽사리 그러지 못할 정도다. 건너 건너 아는 지인들 중에 취업 비자를 연장하지 못해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나도 영주권을 받으려면 취업 비자를 앞으로 2년 반 더 유지해야 하는데, 이 비자 때문에 요즘은 이직도 어렵고 여전히 발이 묶인 느낌이 든다.


생활도 점점 팍팍해지는 게 느껴진다. 4년 전 처음 런던에 왔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물가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숨이 막힌다. 틱톡으로 이직하며 연봉이 제법 올랐지만, 소득 구간이 높아져 세금도 늘어난 탓에 실수령액은 큰 차이가 없다. 특히 런던에서는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이해하기 쉽게 원화로 환산하면, 지금 약혼자와 소득을 합치면 세전 연 3억 원 정도 되는데 매달 들어오는 월급으로 런던에서는 둘이서도 살기에도 조금 빠듯한 수준이다. 우리 둘은 전형적인 HENRY, 즉 'High Earner, Not Rich Yet'이다. 소득은 높지만 아직 자산은 많지 않아 경제적 자유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을 뜻하는 신조어인데, 딱 우리 얘기다.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영국에 온 것을 후회하나요?

최근에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한국을 떠나 영국에 사는 친구들과 런던살이의 고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다들 하나같이 사는 게 힘들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기면 돌아갈 거야?"라고 물으니 또 하나같이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나 역시 영국에 살면서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영국에 온 것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빨리 결심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물론 이건 나와 가까운 친구들의 이야기다. (아무래도 비슷한 생각을 하니까 친구겠지.)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귀국을 결심하거나,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떠나기도 한다. 영국 사람들마저 요즘은 영국을 떠나는 분위기일 만큼, 영국이 예전만큼 살기 좋은 곳만은 아닌 것도 사실이다. 나는 떠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불쾌한 일을 겪거나, 런던 물가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현타가 종종 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에 살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 한국에서의 나는 늘 번아웃 상태였고, 주변의 반응에 끊임없이 감정을 쏟으며 성공을 꿈꾸는 염세주의자였다. 지금은 내가 살고있는 삶이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풍요롭다. 타인의 시선에 자유로워 지면서 비로소 나다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왜 같은 환경에서도 누군가는 행복하고 누군가는 불행할까?


해외 생활이 불행하게 느껴지는 이유

개인적으로 해외 생활이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교'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처럼 성인이 되어 해외에 나온 경우, 살고 있는 나라와 출신 나라의 가치관 사이에서 늘 방황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 나이쯤 되면 연봉이 얼마여야 하고, 결혼을 해야 하고, 누구는 주식으로 얼마를 벌었다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고, 누구는 청약에 당첨돼서 아파트를 샀다는데 나는 아직 월세에 산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난다. 한국을 떠나 해외살이를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한국의 기준을 들이밀면, 두 나라의 삶의 구조가 워낙 다른 탓에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장 빠르게 불행하게 만드는 주제는 역시 '돈'이다. 4년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월급은 세후 420만 원정도 였는데, 동생과 함께 살며 월세, 교통비, 공과금을 다 합쳐도 고정 지출이 50만 원, 월급의 12%도 안 됐다. 나머지는 저축하거나 생활비로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약혼자와 함께 사는 런던 Zone 2/3 월세가 2,000파운드(약 380만 원)인데, 집주인이 2년간 올리지 않아서 이 정도인 거지 런던 시세를 생각하면 운이 좋은 편이다. 여기에 카운슬 텍스와 공과금 344파운드(약 66만 원), 교통비 200파운드(약 38만 원)를 더하면 한 달 고정 지출만 1,400파운드(약 270만 원)가 넘는다. 런던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세후 월급의 40~60%를 이런 고정비로 쓴다. 그러고 나면 나머지 안에서 식비와 용돈을 해결해야 하니, 저축이나 여행은 빠듯해진다.


런던에서의 삶은 숫자만 놓고 보면 정말 초라해 보일 수 있다. 원화로 환산하면 억대 연봉을 훌쩍 넘었지만 나의 삶은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하다. 하지만 영국과 한국은 화폐도, 시스템도, 삶의 구조 자체가 다른 나라다. 이런 1:1 비교를 하면 할수록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돈뿐만 아니라 남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습관 자체가, 어느 나라에 살든 불행의 시작이라는 걸 해외살이를 하면서 더 선명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런던에서 살다 보니,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생겼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 관계, 그리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 그게 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여기서 그걸 찾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은 Trade off

영국에 살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이 세상에 완벽한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삶과 영국에서의 삶을 비교했을 때, 물질적으로 포기한 것들이 분명히 있다. 한국에서처럼 쇼핑을 마음껏 즐기거나, 친구들과 새로운 맛집을 다니거나, 별생각 없이 여행을 훌쩍 떠나는 것들이 이제는 조금 더 신중한 결정이 됐다.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 빠르고 편리한 대중교통, 24시간 돌아가는 도시의 편의처럼 한국에서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런던에서는 없거나 훨씬 비싸다. 그런데 그 대신 얻은 것들이 있다. 퇴근 이후의 삶을 챙기고, 연차를 원하는 만큼 다 쓰고 아프면 무조건 쉬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문화. 아이 때문에 일찍 퇴근한다고 말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 퇴근 후 자기계발을 하거나 무언갈 배우지 않고 그냥 쉬어도 죄책감이 없는 것. 이런 것들이 나도 모르게 인생의 우선순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그냥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느낌이다. 여기선 내가 어떻게 생겼든, 어디서 왔든, 어떤 선택을 하며 살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한국에서는 나도 모르게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늘 두려웠는데, 여기서는 그 궤도 자체가 없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그게 자연스럽다. 그 자유로움이 처음엔 낯설고 때론 외롭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게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트레이드오프가 모든 사람에게 가치 있는 건 아니다. 물질적인 편리함과 생활의 안락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영국이나 유럽의 삶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해외 생활이 너무 불행하게만 느껴진다면, 돌아가는 것도 충분히 용기 있는 선택이다. 이건 누구의 선택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해외살이는 그 자체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 평생 정착을 결심하게 되든, 결국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되든, 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나를 바꿔놓는다.



나만의 가치관, 행복 세팅하기

늘 남들과, 사회의 기준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평생을 살아온 내가, 영국에 와서 비교를 멈추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 나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 완전히 다른 구조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 됐다.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멈추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은 그냥 다른 것이지, 누가 더 잘 살고 못 사는 게 아니라고. 그러면서 나만의 기준을 새로 세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물질적인 성공 기준을 런던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는 걸 내려놓고, 지금 내 삶에서 의미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봤다. 그렇게 눈을 돌리고 나니, 소소하지만 확실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출근 전 동네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날이 좋은 날 근처 나가 앉는 공원 벤치, 퇴근 후 약혼자와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는 시간. 런던은 조금만 걸어 나가면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공원이 있고, 별것 아닌 풍경인데 괜히 마음이 차분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행복의 기준을 바꾸는 건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남들의 기준을 내려놓고, 지금 내 일상에서 좋은 것들을 알아채는 연습을 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물론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고, 경제적인 현실이 주는 무게가 가볍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그 무게를 남과의 비교로 더 무겁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배웠다.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들수록, 지금 내 마음이 진정으로 느끼는 것들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힘든 순간에도 한 번쯤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 글을 통해 한국이 별로고 해외가 최고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리고 해외살이가 단순히 남들과 비교를 멈추고 긍정적으로 산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나아진다는 것도 아니다. 해외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은 모국에서 겪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그 무게를 절대 알 수 없다. 어디에 살든 삶은 쉽지 않고, 완벽한 나라는 없다. 다만 지금 한국을 떠나 사는 삶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거나, 해외살이를 막연하게 꿈꾸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 하나만 말해주고 싶다. 남들의 의견이나 부정적인 콘텐츠에 너무 흔들리지 말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과 방향이 맞는다고 느껴진다면 한 번쯤은 시도해 볼 만하고 견뎌볼 만 하다고. 완벽한 타이밍은 오지 않는다. 나도 불확실한 미래에 그냥 무작정 배팅해 떠났고,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됐다. 지금 어딘가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출근길 이런 풍경 보면 힘들다가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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