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가 떠난 후
'자리'라는 말의 뜻은 '사람이나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즉 자리는 그것을 차지할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그 무언가의 유무에 따라 차있거나 비어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모든 공간이 자리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나에게 존재감 있는 어떤 것이 주로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공간이어야 비로소 어떤 것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얼마 전 함께 살던 반려견 가루가 세상을 떠났다. 강아지 나이로 17살이 넘었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마지막은 갑작스럽게만 느껴졌다.
내가 친정 집에 들어오면서 7년 만에 다시 함께 살게 된 가루는 노견이 되어 이전처럼 짖거나 뛰어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노화가 진행될수록 움직이는 시간이 줄어 존재감이 작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루가 없는 집에서 나는 생각보다 큰 허전함을 경험하는 중이다. 딱딱하게 굳은 몸을 처음 봤을 때나 화장터에 들여보낼 때 느꼈던 슬픔과는 다른 감정이다. 개어 놓은 빨래나 물이 남은 물컵을 보면서 이제 가루가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한다. 빨래를 개어 놓으면 꼭 그 위에 몸을 뉘이던 가루의 빈자리, 마시다 남은 물을 부어주던 물그릇의 빈자리가 말 그대로 느껴진다. 슬픔이나 상실감과는 다른, 처음 겪는 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던 중 이게 '빈자리를 느낀다'는 거구나 깨닫게 되었다.
밖에서 뛰어노는 다른 강아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리움, 미안함 등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반면 집 안에서 문득문득 느끼던 빈자리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비슷한 경우를 생각해 보니 기숙사 룸메이트가 전학을 갔을 때나 직장 동료가 발령이 났을 때가 떠올랐지만 이때의 빈자리는 비슷한 자격을 갖춘 누군가가 채울 수 있는 것이었다. 가루의 빈자리는 이제 아무도 채울 수 없기에 그토록 강하게 와닿았나 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계속 몸으로 부딪혀 익숙해져야 하듯이, 빈자리도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집안 곳곳 남아있는 빈자리를 다 발견하고 나면 가루가 이 세상엔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강아지 한 마리 없는데 온 집안의 가구가 다 사라진 것 같다던 누군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도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