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남매맘 딤섬의 힐링 여행
우리 집 사남매를 소개합니다.
눈물이 많지만 언제나 든든한 첫째 아들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개구쟁이 둘째 아들
우리 집 똘똘이 애교만점 셋째 아들
늘 당당한 고집쟁이 막내딸
성격이 확확 변하는 경상도 엄마를 만나서 엄마랑 같이 자라고 있다.
아들 셋 일 때는 딸이 하나 필요하다고 다들 그러더니
막내딸을 낳고 나니 넷을 어떻게 키우냐는 잔소리를 듣고 있는 요즘.. 머가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네 아이로 충분히 행복하다
AM 6: 30
"엄마 엄마"
"엄마 일어나요"
엄마랑 같이 자는 셋째와 넷째가 엄마를 깨운다.
더 일찍 일어날 때도 있지만 둘이서 놀다가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엄마를 열심히 깨운다.
(그런 건 기특한 것 같다)
엄마가 안 일어나는 것 같으면 넷째의 묘기가 시작된다
엄마 몸 위를 왔다 갔다 하다가 엄마 얼굴을 뭉개기 시작한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막내의 기저귀부터 확인한다.
엄마가 일어나는 인기척 소리에 옆방에서 자던 두 아이(첫째 둘째)가 엄마를 부른다
그렇게 사 남매 전부 기상을 한다.
AM 7: 00 예약해둔 밥이 다되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침을 준비한다
아점이 없는 우리 집...
주말에도 아침->간식->점심->간식->저녁을 먹는다.
그래도 평일에는 아침 잘 먹고 등원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침은 늘 간단하게 4그릇을 만든다. 놀고 있던 아이들은 밥 소리에 달려와서 아침을 먹는다.
아이들이 아침을 먹는 동안 나는 아이들의 옷을 고른다. 둘째는 자기 패션이 확실하기 때문에 입고 싶은 옷이 있으면 스스로 미리 챙겨둔다. 막내는 아직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지만 어린이집 가방까지 메고 집을 나선다.
유모차를 타는 것보다 걷는 걸 좋아하는 막내
오빠들 손은 잘 잡고 다니지만 엄마손은 잡지 않는다 (왜?) 막무가내로 뛰어다니니 위험해서 등하원 시간에는 유모차를 태우고 다닌다. 막내를 위한 뻥튀기나 과일을 챙겨나간다. 등원 나가는데 이렇게까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갈 일인지 모르겠다.
늘 나가던 등원길이라 그런지.. 이제는 익숙하게 이동한다. 작년 이 길을 갈 때는 힘들었는데 아이들이 클수록 조금씩 수월해지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많이 힘들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많이 힘들었던 작년을 보내서 인지 내가 느끼는 체감은 다르다.
등원하면서 '내가 진짜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비가 오는데 넷째는 유모차 타기도 싫은데 레인커버까지 씌워서 난리가 났다. 셋째는 위모차에 설치한 발판에 타고는 잘 들지도 못하는 우산을 들겠다고 때를 쓴다. 혼자 걸어가는 둘째는 비 오는 게 위험해 보여서 내 옷이 다 젖더라도 둘째를 잡고 걸어갔다. 그런 시간들이 있어서 인지 지금의 등원길이 참 여유 있다고 생각한다.
삼 형제가 교육기관에 가고 나면 막내와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둘째까지만 해도 집에 있는 게 답답하고 우울해서 힘들었다. 집안일은 뒤로 미루고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문화센터도 가고 키즈카페도 가고 했었다. 시간이 안 가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르다. 셋째부터는 집에 있는 게 편했다. 큰아이들 오기까지 해둬야 할 일도 많았다. 어질러진 집도 정리하고 가볍게 청소기도 한번 돌린다. 아침 먹은 설거지도 하고 쌀도 씻어서 올려둔다. 가족들이 먹을 반찬도 2~3가지 만들고 빨래도 분류해서 세탁기를 돌린다. 달달하게 만든 아이스라떼가 어느새 사라져 있다. 점심을 먹은 막내가 잠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나를 위한 혼밥을 만든다. 건강을 위해서 라면을 줄이고 잘 챙겨 먹으려고 노력한다. 나만의 밥시간을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처음에는 혼밥이 익숙해지지 않아서 힘들었다. 누군가 불러서 밥을 먹는다는 게 지치기 시작했고 같이 먹지 못하는 날은 우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우울의 늪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즐기는 법을 조금씩 찾아 나갔다. 한 번씩 지인과 먹는 밥도 즐겁지만 지금은 혼자 조용히 먹는 밥시간도 소중해졌다.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
어차피 나에게는 육아의 연장선일 뿐이다. 나는 무언가 하는 게 없다. 내가 하는 일은 '육아'에 집중되어 있다.
놀이터만 가면 1~2시간씩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 때가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엄마들 사이에 나는 혼자 서있었다. 내성적이고 먼저 다가가는 걸 잘하지 못해서 늘 뒤에 서있었다. 아이들의 안전만 생각했다. 지금은 네 아이의 아전에 유의하며 놀이터 노는 게 쉽지가 않아서 미리 아이들과 약속을 한다. 30분만 놀기, 미끄럼틀 3번 타고 가기 등~ 할 수 있는 정확한 약속을 한다. 우리만의 규칙을 가지고 논다. 나는 여전히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다 성격상 육아가 맞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종종 엄마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었다면 좋았겠다 싶은 일도 있었다. 공통적인 주제가 있음에도 나는 쉽게 다가가지 않는다.
집에 가기 싫다고 때를 쓴다. 울면서 떼쓰기 시작하면 나는 흔히 말하는 '멘붕'에 빠진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때를 쓰면 혼내기도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로 때를 쓰기 시작하면 나는 정신줄을 하나 놓는다. 정신줄을 꽉 붙들고 있으면 힘들다. 떼쓰다가 어느새 엄마를 바라보는 그 순간 아이를 달래 준다. 아이와 약속을 이야기하며 집으로 들어간다.
어린 셋째와 두 마리를 가정보육하는 게 쉽지 않았다. 몇 달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길어졌다. 4월에 가기로 했던 사이판 여행도 취소가 되었다. "겨울에 가면 더 좋을 거야.."라고 마음을 잡았다. 다시 비행기티켓을 끊고 호텔을 예약해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출산한 지 오래되지 않아 우울했고 그 우울증이 심해짐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빌어먹을 육아'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이때 나는 세 아이 육아가 익숙해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학교는 [휴교]의 연속 어린이집도 [긴급보육]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를 임신하고 출산하게 되었다. 신랑이 세 아이를 봐야 하는 상황이라 보호자 없는 출산이 시작되었다. 신랑은 아이 낳은걸 보고 확인한 후 입원실에는 올라가지 못하고 돌아갔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혼자 침대에 누워있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1년간의 사 남매 육아가 시작되었다. 넷째를 출산하기로 결심하고 마음을 다 잡았지만 현실은 더 가혹했다. 그래도 3번의 육아를 함께 해온 신랑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첫째 때는 그렇게 싸우고 서로의 편의만 주장했는데 지금은 서로를 위해서 조금씩 양보하고 도와주려고 하고 있다. 이게 부부인가? 이게 가족인가? 그걸 지금에서야 느낀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신생아도 있고, 면연력이 약한 아이도 있어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하루에 30~40만 명 나올 때도 피해 갔었다. 아이들과 여행도 가고 싶고 키즈카페도 가고 싶고 나들이도 나가고 싶었지만 참았었다. 생일날에는 3년째 집에 갇혀 있는 게 우울했고 힘들었었다. 어디든 뛰쳐나가고 싶었다. 창밖을 보며 '저 하늘 위는 자유로울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마다 꽃을 한송이 사보기도 하고 아이들과 집 근처에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지인들의 여행이나 나들이 이야기를 들으면, 난 왜 저러지 못할까 하면서 아이를 붙들고 울기도 했다.
힘들었지만 잘 넘겼다고 생각했다. 교육기관들이 정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이 일상으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과 조심씩 외출을 시도했다. 더 이상 갇혀 있으면 코로나보다 더 위험할 것 같았다. 3년간 나들이를 못 간 아이들은 신이 났다. 계속해서 가고 싶은 곳들을 말했다. 동네 말고는 외출을 해본 적 없는 셋째와 넷째는 "우와~" 감탄사부터 시작했다. 평일에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주말에 소소하게 나들이 나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안도하던 그때, 이 정도도 우리 가족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을까?? 코로나가 찾아왔다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힘든 3주를 보냈다 가족이 많다 보니 코로나 시작부터 마지막 격리 해제까지 딱 3주 걸렸다. 셋째가 일주일 내내 열하고 힘들어해서 안 되겠다 싶었다. 내가 전화해볼 수 있는 모든 곳에 전화를 해도 입원가능한 병원이 없었다 119를 전화해도 답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 시간을 버텨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뒤 나는 아프기 시작했다
출산을 하고 나면 몸조리도 하고 아이가 어린이집 가기 시작하면 운동도 하면서 건강관리를 해왔다. 셋째 넷째는 코로나로 인해서 몸조리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운동은커녕 아이들이 모두 가정보육을 해야 했다. 우리 집에 코로나가 왔다 간 뒤 나는 아프기 시작했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모르겠다. 소화가 잘 안 되기 시작했고 소화가 될 때마다 통증이 찾아왔다. 맹장은 심하게 부었고 귀에 이명이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어디 안 좋은 건 아닐까??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기본 검진을 받았지만 이상이 없었다. 통증에 실려간 병원에서 염증 수치가 높다는 말에 입원도 했다.
"몸이 무리를 했다"는 신랑의 말에 울컥하기도 했다. 그래 내 몸은 무리를 해왔다. 신랑과 시간을 조율해 운동을 시작했다. 몸이 좋을 때는 아이들과 나들이도 나가며 기분 조절도 했다 우울증과 건강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가족은 힐링이 필요하다
(ps. 나는 힐링이 필요하다)
코로나 완치 이후 우리 가족은 지쳐 버렸다.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나는 12월 제주도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신랑에게는 통보형태였다. 빠듯한 살림에 한마디 들으면 어쩌지 걱정했다
"잘했어 날짜는 언제야?"
나를 이해해준 걸까? 신랑의 그 말에 왈칵 눈물이 났다.
"기왕 가는 거 좀 길게 다녀오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두근 거림은 멀까?
처음 외국으로 여행 갈 때보다 더 두근거렸다. 이미 내 마음은 제주도 바다 앞에 가있었다. 일정이 넉넉했기 때문에 아이들 보면서 틈틈이 가고 싶은 곳을 찾았다.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보며 맛집과 숙소를 추렸다.
멋진 호텔에 머물면서 호캉스도 하고 예쁜 감성숙소에도 묵고 싶었다.
맛있다는 맛집은 대기가 있어도 가보고 싶었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분위기도 잡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호텔은 우리 가족이 다 머물를 수가 없었다. 머무를 수 있는 방이 있어도 가격이... 우리가 갈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방 2개를 잡기도 부담스러웠다. 감성숙소도 다둥이네인 우리가 가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우리 가족이 다 머무를 수 있고 가성비가 좋은 숙소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 가족이면 다둥이를 받아주는 숙소를 찾았다. 자연과 함께 있으면 그곳이 감성숙소지 싶어서 자연휴양림에서 숙박을 해보기로 했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상상하는 숙소가 아니어도 아쉽지 않다. 아이가 있는 가족이라면 다들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또 다른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렌터카도 7인승 이상을 예약해야 하는데... 여전히 가격이 쉽지 않았다 승합차는 처음 예약해서 그런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은 소형이나 승용차기준이었다. 여러 렌터카 회사를 보며 가격 기준을 잡아나가고 있다.
처음이라 어색할 뿐이다.
그 어색함 속에서 나는 즐거워하고 있다. 애매한 건 신랑에게 물어본다.
"도와줄 테니 네가 하고 싶은데로 해"
예약하거나 일정을 잡는 건 도와주지 않지만 (내 성격이 강해서) 옆에서 해주는 말 한마디가 힘이 된다. 즐거움이 된다.
가면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도 어딜 가면 입장료부터 먹는 비용에 많이 들어서 도시락과 간식은 미리 집에서 준비해서 간다. 입장료는 최대한 할인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다. 제주도에 가면 여기 같이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왜 여행을 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여행이 주는 힘]이 있다.
숨을 쉬기 위해 떠나는 여행
사람마다 기분을 전환하고 삶의 힘을 얻는 건 다 다른 것 같다. 나도 20대 때는 지금 같지 않았다. 그때는 여행이 삶의 즐거움이었지만 나의 기분을 좌우하고 삶의 힘을 주는 요소는 아니었다. 일하다가 힘들면 부모님 집으로 왔고 엄마가 해주는 요리와 아빠의 잔소리가 좋았다. 가족끼리 맛있는 밥 먹고 대화하다 보면 기분도 좋아지고 스트레스도 풀렸었다. 집 근처 산책도 다니고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씩 부모님과 여행을 떠났다. 어떤 곳을 갈까? 멀 먹을까? 즐거움이었다. 답답해서 우울해서 떠나는 여행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정말 다르다. 이제는 나의 가족을 이루었고 나에게서 안정과 힘을 얻는 아이들이 있다. 어느새 나는 그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예전처럼 엄마의 음식을 먹고 다 같이 이야기를 해도 내 기분은 변하지 않는다. 출산과 육아를 하느라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전공을 포기해야 했다. 나는 점점 나를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꿈꾸던 30대는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결혼생활가 가정이 아니었다. 누구나 꿈꾸는 길을 가지는 않겠지만 많은 것들이 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 기분이었다. 너무 힘들고 우울했다. 신랑이 나를 이끌고 처음으로 우리 가족이 여행을 떠났었다.
차 끌고 가는데 단풍나무 터널이 나왔다. 주위에 차는 한 대도 없고 우리는 단풍 터널을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다음날 아침 쌀쌀한 바람에 불었다. 장작 앞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는데 모든 생각이 단숨에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이게 힐링인가? 새로운 기분과 느낌이었다. 머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 뒤 한 번씩 힘들 때 돈을 모아 모아 여행을 떠났다. 멀리는 못 가보고 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누군가는 그냥 나들이고 일상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느끼는 건 다르다는 걸 나는 이때 꺠달았다.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아이를 낳고 많은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코로나는 나에게 겨우 생긴 '힐링'을 무너뜨렸다. 나는 오기로 악으로 버텨야 했다. 현실은 상상보다 잔인했지만 버틸 수 있었다. 정말 한계치에 다 달았을 때 왈칵 눈물이 나기도 했다. 어떻게든 다른 '힐링'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건강까지 나빠지면서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힐링이 필요해서 덜컹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