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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k parks at the park Dec 05. 2023

억울하면 출세해라?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기성화(旣成化)에 반대하며

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두가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인구문제이다. 사실상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절대적인 요소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사회, 국가의 양적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인구라는 변수인데 한국사회의 출산률은 어찌된 일인지 전세계에서 제일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출산률 저하현상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흔히 주목하는 원인들로는 우리사회의 과도한 경쟁이나 사교육의 문제, 가계부채의 문제 등등이 있고 문제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해법도 제시되고 있지만 전망은 밝지 못하다. 그런데 피상적으로 나타나는 지목되는 여러문제들과는 조금 다른 어찌보면 오랜시간동안 우리들의 사회적 뇌속에 체화된 잘못된 능력주의 더 나아가 엘리트주의를 비판해 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어떤 사회가 살만한 곳인가를 따질 때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 사회에서 내가 어느정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그만큼의 결실을 보장받을 수 있다라는 효능감의 시그널이 주어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과연 우리사회는 어떠한가. 젊은 세대가 서울에서 터를 잡고 살기에는 너무나 진입장벽이 높고, 직업적 안정성면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의대광풍은 교육의 풍향계를 바꾸어 버렸다. 일종의 '적자생존'의 경쟁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회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런 치열한 사회적 경쟁의식의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능력주의'이다. 여기서 '능력주의'를 나는 '억울하면 출세해라'라는 우리사회의 속된 관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한다'라는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능력주의의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사회의 능력주의는 일종의 잘난놈이 독식하는 '승자독식'의 세계를 정당화하고 비호하는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능력주의 이념은 오랜시간 사람들의 의식속에 일종의 방어논리로 자리잡아왔고 사람들은 그러한 구도 자체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로인한 과도한 경쟁과 결과에 대해서 '이미 기회를 부여받았고 그 결과는 수용해야 한다'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얼핏보면 매우 합리적이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걸맞는 구호처럼 들리지만, 과연 '억울하면 출세해라'라는 말은 실제로 타당한 말인가? 나는 이말은 거짓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해 온 측면이 강하다라고 생각한다. 주로 기득권층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프리미엄을 존속시키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해 온 것이다. 왜 그렇게 보는가.

먼저 '억울하면'이라는 전제를 생각해 보자. 보통 억울하면은 '내가 가진 이 프리미엄이 부러우면 당신도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나의 위치에 경쟁을 통해 도달하라'라는 말로 들리는데 사실 이 전제속에 가정된 프리미엄 자체가 과연 정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찌보면 이것은 승자독식의 과도한 프리미엄을 가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과도한 편취를 단순히 너도 기회를 줄테니 시도는 해봐라 라는 말로 공정함을 가장하고 있는것일 수 있다. 이 전제가 올바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성공'의 편익이 적절한 정도의 것인지에 대해서 깊은 숙고와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두번째로 상기한 전제속에 함의된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는 주어졌으므로'라는 말을 따지고 볼 때 평범한 서민들이 기존의 기득권층에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 (한국은 OECD국가에서 빈부격차가 세계 2번째로 빠르게 커지고 있는 나라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기회의 가능성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학생들의 학업에서도 부모의 소득은 중요한 변수가 되며, 특히 서울에서 아빠찬스,조부모 찬스가 없이 젊은 세대가 자신의 집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의 능력주의가 확장되어 한국적 엘리트주의로 발전한다고 보는데 이 엘리트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경쟁을 통해 입신한 엘리트들에게 큰 권한을 부여하고 믿고 사회시스템의 주요 권한과 책임을 맡기는 것이 과연 성공하기만 하고 있는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그러한 엘리트주의는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여왔고 그 카르텔이 과도한 권력과 이익을 가져가는 것을 무수히 많이 보아왔다.(사실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문제이긴 하지만) 이러한 카르텔의 구조를 정당화하는 기제로서 작동하는 '엘리트주의'는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중용되고 그들이 엄청난 권한을 가지는것을 쉽게 정당화하지만 그것은 집단이기주의로 작동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이러한 능력주의와 엘리트주의가 팽배하여 극단화 되면 그것에 저항하는 격한 저항이 표출될 수 있다. 일례로 일본의 경우 기존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작용에 편승하여 나타는 현상이 있다. 최근 일본의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유튜버 중에 니시무라 히로유키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사람은 전통적인 엘리트의 범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하는 유튜브 방송에 젊은층이 엄청나게 호응하고 그런 인기를 계기로 요사이는 일본의 지상파에까지 진출해서 오피니언 리더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일본의 젋은이들이 교수,학자, 정치인과 같은 기존의 '사회지도층'에 대한 불신감이 커지면서 그들과는 다른 문법으로 말하는 유튜버에게 더 의존하고 귀기울이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결코 더 나은 현상이라고만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내의 대결구조와 불신의 사이클을 더 키울 수 있는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러면 결론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과정'은 더 투명하게 하면서 우리 사회의 성공의 공식을 지키고 보장하되 그 결과에 대한 '관찰'의 시선도 결코 거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억울하지 않으면 그대로 살고 억울하면 시도해보건데 실패한다면 잠자코 있으라라는 명제에 쉽게 동의해서는 안된다. 억울한 것이 아니라 노력의 과정에는 박수갈채를 보내고 그 결과로서의 성공에 대해서도 동경과 존경을 보내되 그 과정의 투명함과 결과에 대한 적절성에 대해서는 다같이 고민하고 논의하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효능감'을 높일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더 살만한 곳으로 인식되고 자연스럽게 구성원들도 늘어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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