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연애의 단상, '500일의 썸머'
(주의) 본 포스팅은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영화 리뷰는 영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 혹은 영화에 대한 기술적 해석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난 후 떠오른 개인적인 감상평임을 사전에 알려드립니다.
그가 나를 짜증나게 하는 말을 했을 때, 내 첫 번째 반응은 말 그대로 감정적인 것이었다. '짜증나.' 그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더 짜증이 났고, 갑자기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다는 생각이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또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음번에 그사람을 만나면 나는 당신이 이런 말을 할 때 화가 나요, 하고 말해야지. 나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으니 그 사람은 내가 그 말을 기분 나빠하는지 알 길이 없어. 그러니까 말해야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달라고. 이건 아마 감정을 정리하여 나는 당신의 이런 점이 불만스럽다, 라는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에서부터 비롯된 반응이었을 것이다.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내가 이 사람과 긴 시간, 혹은 뭐 결혼이라도 해서 앞으로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하게 된다면, 이사람은 이런 식으로 나를 계속해서 무시하게 될까? 나는 그럼 그 모든 순간에 상처받고 화내고 울게 될까? 혹은, 그래서 결국 나도, 남자에게만 의존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 생각도 못하는, 잘난사람들에게 무시만 당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하는 굉장히 뒤틀리고 암울한 생각이 저 바닥에서 머리를 쳐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의 맨 마지막 꼬리에 따라붙은 것은, 혹시 그 사람의 말이 맞는 소리는 아닐까, 나는 그저 그 사람의 말에 찔려서, 정말로 힘들지 않은 일을 붙잡고 힘든 척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나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인 것은 아닐까, 하는 자격지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그 사람이 던진 딱 한 마디.
니가 그렇게 할 일이 많아?
이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두려웠었다.
이토록 한 사람의 짧은 한 마디에 휘둘리고,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고, 나의 심연을 쳐다보고, 그 심연에 실망하고, 또 뒤틀린 생각들을 하고, 또 혼자가 되고, 외로워지고, 함께 하고 있는데도 그저 외롭게만 느껴지는 그 모든 과정을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런 감정을 털어놓는 대신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내 감정을 나만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무도 내 감정을 알지 못한다면 서로가 행복한 관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해결책도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몇 번의 관계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모든 말을 다 하는 것 역시도 관계에 있어 그 어떤 진전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 역시도알고 있었다. 관계에서 어떤 설렘이라든지, 울림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찾기에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내가 흘릴 눈물들이 이미 말라붙어 있었고 나는 스물다섯의 연애를 그렇게 계산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실은,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주인공인 톰보다도 썸머에게 무척이나 공감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썸머는 대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감독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톰의 눈을 통해 썸머를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톰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썸머를 보았는지를분명하게 드러낸다. 톰이 사랑했던 썸머는 톰의 생각 안에만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썸머가 링고스타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톰은 그런 그녀에게 핀잔을 준다. 톰은 단 한번도 썸머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의 힘든 순간은 어떤 것인지, 어떤 순간 그녀가 기분이 상하는지에 대해 물은 적이 없다. 톰은 오로지 혼자만의 세상에서 홀로인 사랑을 했고 그래서 썸머는 늘 외로웠다. 링고스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아무도 링고 스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받아치는 그 남자 톰 때문에.
어쩌면 우리 모두의 관계는 사실 그렇게 일방적이고 때문에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모두들 썸머를 썅년(bitch)이라고 불렀었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번쯤 그런 나쁜 년을 만난다며, 그렇게 사랑해줬는데도 상처를 주고 떠나버린 그녀를 욕했었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썸머를 만났던 적이 있다, 뭐 이런 비슷한 말이 국내 홍보용 멘트였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영화를 볼수록 우리는 찌질한 톰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니, 정말로 더 찌질한 스스로와 마주하게 된다.
실은 모든 관계는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끝난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서로를 불신하고 배척하고, 혹은 때로는 서로를 각자의 방식으로만 일방적으로 사랑하려 할 때 문제는 발생한다. 그래서 결국 관계는 끝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대신 상대방을 탓하는 방식으로 아픔을 해결하려 한다.
몇 번인지 알 수 없는 몇번의 연애 끝에 썸머는 진지한 관계는 싫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른다. 영화 속에서 그 과정은 짧게 간추려져 있다. 썸머가 진지한 관계를 기피하게 된 원인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녀의 상처에서 기인하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 연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수없이 썸머는 상처받았고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 썸머는 이제 스스로 진지한 관계를 거부하였다. 하여 톰과의 관계는 진지하지 않은 정도에서 유지하고자 했다. 톰은 그것을 퍽 섭섭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그것을 보면서 이미 썸머 안에서 톰은 어느 정도 진지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진지하게 사랑하지 않았다면 썸머는 링고스타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내뱉는, 상처가 되는 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와 함께 간 펍에서 어이없는 이유로 시비가 붙은 그를 보면서 괜스레 화가 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개선하려 먼저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본 썸머와 톰은 그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위로해주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마치 우리 모두의 관계처럼.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으나 그 상처들을 모두 이해할 만큼 사랑하지는 못하였다.
나와 그의 연애는 무척이나 싱겁게 끝이 났다. 어느 순간 그는 연락을 끊었고, 몇 마디 변명 같은 문자를 끝으로 더 이상 만나기를 거부했다. 수십 번의 만남 속에서 그와 가까워지기를 거부했었던 나는 역설적으로 그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야 눈물을 터트렸다. 그와의 만남 중에서 가장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다음이었다.
연애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이 모든 관계들이 폭풍처럼 지나간 다음에야 나는 비로소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에게도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지금까지 모든 연애들이 끝날 때마다, 상대를 탓하고 상대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내가, 나의 상처와 문제를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톰도 어쩌면, 그렇게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을 갖고 나서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톰과 썸머의 관계는 500일이 지나서야 끝이 난다. 썸머의 관계는 진즉에 끝났음에도, 톰은 미련을 붙들고 늘어진다. 썸머의 초대를 지레 짐작하여 아직도 마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녀의 웃음을 보며 좋았던 시절을 떠올린다. 그 모든 폭풍 같은 고통과 아픔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썸머와 단둘이 만나 그녀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난 다음에야, 톰은 그녀와의 사랑을 끝낸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다음 사람 어텀을 만나고 나서야 그들의 관계는 종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에게 썸머는, 무척이나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 열병 같은 덥디 더운 여름의 계절을 지나, 이제 결실을 맺고 열매를 맺는 가을(어텀)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그 여자 썸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네 번 정도 보고난 뒤, 나는 스스로를 돌아볼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언제부터 그렇게 문제 있는 사람이었는지, 도대체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언제부터 이렇게 삐뚤어진 것인지, 언제부터 그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인지. 이 모든 연애의 실패에는 어떤 원인들이 있는지 차근차근 돌아볼 용기가 그제서야 생겼다.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 가장 최근의 관계들에서부터 차근차근 되짚어 보겠단 계획도 세웠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끝나고 나면, 어쩌면 나는 더욱 더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게 상처받아서, 회복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더 이상 타인을 만나기를 거부할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정상적인 관계를 맺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이야기들을 돌아보고 싶은 것은, 사실은 자학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후벼 파고 또 파서, 더 많이 아프게 되기를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그만 울고 싶다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사족)
영화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때, 아니 대학교 1학년 때 정도였던 것 같다. 그때는 막 스무살이 된 파릇파릇한 학생이었고, 지금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언 7~8년이 되어가는 사회인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썸머’로, 톰이 새롭게 만나게 되는 여자의 이름을 ‘어텀’으로 붙인 것이 어쩐지 거슬린다. 일견 톰이 만나는 여자들을 지나쳐가는 계절에 비유한 것 같아 약간은 불편해지는 마음을 애써 눌러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 영화다. 볼때마다 각기 다른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되고, 보면 볼수록 내가 놓쳤던 장면들을 찾아내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구정, 할 일 없어 집에서 빈둥거릴 때 한번 더 꺼내보고 싶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