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라랜드(LALA LAND)'
(주의) 본 포스팅은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영화 리뷰는 영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 혹은 영화에 대한 기술적 해석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난 후 떠오른 개인적인 감상평임을 사전에 알려드립니다.
누구에게나 노래 한 곡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존 레전드(John Legend)의 'All of me'라는 노래를 무척 잘 부르는 남자가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 그는 나에게 그 노래를 불러주었고 그 이후 우리의 테마곡은 그 노래가 되었다. 그 곡의 노랫말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부분은 'Love....all your perfect imperfections'라는 부분이었다. 당신의 모든 완벽한 결함들을 사랑하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순인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알려주면 그는 그 부분을 부르며 나에게 눈을 맞추곤 했고 그 눈빛에 나는 다시금 그와 사랑에 빠졌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과거형이고 그 사람은 대신 그 노래 한 곡으로 남았다.
영화 '라라랜드(LALA LAND)'의 미아와 세바스티안에게도 그런 테마곡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따라 흥얼거릴 수 있는 그 곡은 그들을 만나게 해주었고, 가까워지게 해주었고, 관계를 극적으로 발전시키게 해주었다. 되는 일이 없어 지치기만 하던 어느 날, 길을 걷다 우연히 들은 그 곡 때문에 미아(엠마 스톤 분)와 세바스티안(라이언 고슬링 분)은 만나게 되었다. 그 후로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곡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스며들었고 사랑하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사랑이란 그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온 이 도시 LA와 닮아있다. 극 초반 등장하는 것처럼 LA는 배우, 음악가, 시인, 영화감독, 소설가 등 다양한 예술인들이 각자의 꿈을 갖고 모이는 장소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부푼 꿈을 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LA로 모여든다. 주인공 미아와 세바스티안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미아는 영화배우 대신 스튜디오 근처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세바스티안은 정통 재즈바를 열려다 사기를 당하고 변변한 일자리도 없는 처지였다. 현실 대신 꿈을 사랑했던 두 청춘은 우연한 몇 번의 만남을 마치 영화같은 운명처럼 느꼈고, 서로에 대한 이끌림 속에서 몽환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영화 속에서 그들이 사랑하는 과정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때로는 노래이기도 하고, 춤이기도 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눈짓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를 때로는 몽환적으로 그려내고, 때로는 화려하게 표현하기도 하며,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은 실제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닮아있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집중하면 마치 암전 속에서 핀조명이 켜진 것처럼, 한 사람에게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처음엔 싫어했다 하더라도 그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점차 사랑하게 된다. 재즈를 싫어한다고 말했던 미아가 세바스티안 덕에 재즈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처럼.
영화 속에서 LA가 대표하는 것이 꿈이라면, LA 밖의 다른 도시들은 현실을 의미한다. 정통 재즈에 대한 열정과 고집을 가지고 있었던 주인공 세바스티안은 어느 날 우연히 미아의 통화를 엿듣고 변화를 결심한다. 그는 퓨전을 혐오했고(삼바 타파스 집을 혐오했던 것처럼) 진지한 재즈를 하지 않는 것을 참지 못했지만(크리스마스 음악을 연주하길 주문하는 사장의 말을 거역하고 자기 맘대로 연주를 했던 것처럼) 미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꿈을 잠시 접고 현실과 타협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LA 밖 다른 도시들로 투어를 떠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LA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 며칠씩 사라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가 없는 사이 미아는 홀로 LA에 남아 꿈을 지키는 방식을 택한다. 웨이트리스 일을 완전히 버리고 과거의 꿈을 찾아 폐업한 극장에서 홀로 일인극을 올리기를 계획한 것이다. 그 과정은 쉽지 않고, 매 순간 힘든 일들의 연속으로 비춰진다. 반면 현실과 타협을 택한 세바스티안은 승승장구의 길을 걷는다. 그가 속한 밴드는 점차 유명해지고, 팬들은 늘어나고 사람들은 환호하며, 음반은 점점 더 잘 팔려나간다. 그런 그를 보며 아마 미아는 점점 더 비참함을 느꼈을 것이다. 꿈을 향해 타협 없이 나아가는 것은 사실 의미없는 일은 아닐까. 사실은 너무나도 무모하고 멍청한 것은 아닐까.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 아니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중인 것은 아닐까.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내 무대의 불은 꺼졌는데, 그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아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고 꿈을 향해 정진한 덕에 성공한 캐릭터를 맡았다면, 세바스티안은 현실과의 타협 덕에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된 경우에 속한다. 세바스티안은 오롯이 정통 재즈만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아무도 듣지 않으면 지키는 의미가 없다'는 동료의 말에 결국 퓨전 재즈 밴드에 들어간다. 재즈와 기계음과 백댄서와 코러스가 혼합된, 어느 장르의 음악인지도 분명히 알기 어려운 음악을 하는 그 밴드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 무대 위에서조차 세바스티안은 최선을 다한다. 지금은 현실과 타협하여 직업으로 이 밴드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 만족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덕에 번 돈으로 그는 꿈꾸던 정통 재즈바를 열어 성공한다. 과정은 미아와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그 역시도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과정 때문에 이 두 사람이 서로 헤어져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꿈을 꾸는 도시 LA에서 만나 서로를 사랑했지만 서로 다른 선택 때문에, 각자의 미래 때문에, 현실에서의 성공을 위해 헤어져야 했고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택하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그들의 사랑과 꿈은 계절과 함께 맞물려 표현되기도 한다. 그들은 추운 겨울에 우연히 몇 번 마주친다. 그러나 그때의 계절은 서로에게 너무 추운 때여서, 크고 작은 고통스러운 일들과 힘든 일상에 치여 그들의 관계는 발전되지 못한다. 꽃피는 계절인 봄에 그들은 다시 우연히 만나고 서로에게 끌려 관계를 시작한다.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그들은 뜨겁게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동시에 그들의 꿈 역시도 뜨겁게 불타오른다. 그러나 결실을 맺는 가을을 만나 그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결국 겨울을 맞아 그들은 헤어지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둘이 우연히 세바스티안의 재즈바에서 재회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이다. 둘은 서로를 단박에 알아보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다. 그러나 5년 사이 많은 것들이 변해, 미아의 옆에는 그녀의 남편이 있다. 세바스티안은 그런 그녀를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그들만의 테마곡이었던 노래를 연주한다. 그 노래를 들으며 미아와 세바스티안은 순식간에 5년전으로 되돌아가 모든 추억들을 새롭게 되새긴다. 매 순간이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다시 되새길수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모한다. 동시에 그때 또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남긴다. 그래서 세바스티안과 미아가 만일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느 누가 서로를 위해 희생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펼쳐졌을 것이라는 가정을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준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관의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에 사로잡혔더랬다. 나 역시도 그랬다. 만일 세바스티안이 그녀를 따라 파리로 갔더라면, 혹은 그녀가 함께 투어를 떠나자는 세바스티안의 제안을 수락했더라면, 그도 아니라면 그들이 그냥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을 자꾸만 하게 되었고 그 가정이 자꾸만 마음을 어지럽혔다. 마치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며 하는 부질없는 미련들처럼.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그 미련과 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들은 모두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 영화는 지나간 연인들을 위한 러브스토리이자 세레나데다. 누구나 알고 있듯 지나간 사랑을 다시 추억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간 사랑을 다시 추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이 젊은 날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부풀었던 스스로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서로를 지탱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안은 미아 덕에 변할 용기를 얻었고, 그 덕에 희망하던 재즈바를 실제로 열 수 있게 되었다. 미아는 세바스티안 덕에 놓칠 뻔했던 오디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덕에 꿈꾸던 배우가 되어 행복한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기 그들의 삶에 서로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더라면 그들의 5년 후는 또 어떠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의 엔딩은 슬프지만 동시에 새드엔딩이 아니었다.
일견 영화의 스토리는 사실 새롭지 않다. 누구나 다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진부한 스토리라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아름다운 재즈 선율과 배우들의 열연이다. 그러나 누가 그랬듯 사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듯 러브스토리란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그러나 가장 역사가 오래된 대서사시가 아닌가.
우리의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그들의 사랑도 그래서 노래 한 곡으로 남게 되었다.
그들은 때때로 다시 라라랜드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그러하듯. 문득 길거리에서 마주친 누군가가 예전의 그 사람과 같은 향수를 쓰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고, 우연히 들른 커피숍에서 그와 나의 테마곡이 흘러나와서일지도 모르고, 때로는 정말 우연히 몇 년이 지난 후 지하철에서 그와 닮은 사람을 보게 되어서일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일지는 알 수 없으나 정말 사소한 계기 하나가 순식간에 우리를 그 순간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그 때의 어린 나와 그가 다시 만나 웃고 떠들고 행복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순간을 다시 되새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웃으며 현실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그 모든 순간을 소중히 생각하며,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그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며.
영화에 대한 사족 1.
감독의 전작 '위플래시'도 무척이나 감명깊게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등장한 반가운 얼굴 덕에 '위플래시'가 다시 생각나며 나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지었더랬다. (존 레전드는 덤이고.) '위플래시' 때도 그랬지만 감독이 무척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꽤 많은 시간을 음악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 음악들이 모두 명곡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OST를 구매해 두고두고 다시 듣고 싶은 음악들이다. 심지어는 그 음악들 때문에 이 영화를 꼭 보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위플래시'를 보고난 뒤 한동안 재즈 사랑에 빠졌었는데, '라라랜드'를 보고 난 뒤에도 한동안은 그렇게 될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사족 2.
엠마 스톤은 왜 이렇게 예쁘고 라이언 고슬링은 왜 이렇게 멋진지... 둘은 또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