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청취자가 좋아요
앞날을 알 수 없기에 사는 일이 재미있습니다. 제가 라디오 PD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엔 라디오가 없었습니다.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다행히 이사 온 옆집에서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아 저도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집 마루에 앉아 아주머니, 아이들과 어울려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중요한 중계방송이 있을 땐 아주머니가 저를 불러 함께 들으라고 했습니다. 라디오는 그렇게 제 삶에 슬며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훗날, 저는 MBC 라디오 PD가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라디오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 채 시작했습니다. 그저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사 초기, 친구들에게 자주 들은 질문이 “왜 TV PD가 아니고 라디오 PD야?”라는 말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 TV의 영향력이 훨씬 컸던 시절이었지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괜히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비교하지 않고, 주어진 길이라 믿으며 묵묵히 걸었습니다.
입사 첫해, 부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방송사에서 TV는 도시 같고, 라디오는 시골 같다.” 바쁘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도시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TV 제작 현장, 그리고 소박하고 정 많은 시골 마을처럼 따뜻하고 여유 있는 라디오 제작 현장. 그 비유가 참 마음에 남았습니다. 실제로도 TV와 공동 제작을 할 때마다 느꼈습니다. 인원도 장비도 많고 큰 스튜디오에서 분주하게 돌아가는 TV, 반면 작고 아담한 스튜디오에서 소수 인원이 오순도순 작업하는 라디오. 라디오는 확실히 ‘가족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라디오는 단지 제작 방식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매체가 지닌 문화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교수님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전공한 언어에 따라 교수님의 말투나 옷차림, 성격이 그 나라 사람을 닮아간다는 이야기였지요. 일본어 교수님은 일본식, 영어 교수님은 미국식. 문화는 사람을 닮게 합니다.
라디오도 그렇습니다. 라디오 PD는 라디오 문화적이고, TV PD는 TV 문화적입니다. 청취자 역시 그렇습니다. 라디오 청취자는 라디오적인 감성과 습관을 지닌 분들입니다. 제작자와 청취자 사이, 그리고 청취자들끼리도 어디선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라디오 제작진이 가족 같은 분위기라면, 라디오 청취자도 참 따뜻하고 가족적입니다. 1980년대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DJ 이문세 씨는 청취자들을 ‘별밤 가족 여러분’이라 불렀지요. 그 말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라디오는 그렇게 우리를 한 가족처럼 이어주는 매체입니다.
저는 라디오 청취자들을 깊이 존경합니다. 대개 라디오는 ‘무언가를 하면서’ 듣는 매체입니다. 출근길 운전석에서, 매장의 스피커에서, 독서실의 이어폰에서, 일터에서 손을 움직이면서도 귀는 열어두고 계시는 분들. 라디오를 듣는다는 건, 그냥 쉬는 시간에 TV를 보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삶 속에서 땀을 흘리며, 손을 놀리며, 마음의 귀를 열고 계신 분들입니다. 열심히 사는 분들의 친구, 그게 바로 라디오입니다.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저도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힘든 하루에 작은 웃음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고단한 마음을 살짝 안아드리고 싶었습니다. 세상 어디엔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하며, 색다른 정보와 이야기로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만든다는 일이 참 보람 있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관련 책도 네 권 썼습니다. 그 경험으로 여러 대학에서 라디오 제작 강의를 했고, 인하대학교에서는 무려 12년을 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브런치스토리에서 다시 라디오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습니다.
오래 함께하다 보면 정이 듭니다. 라디오도 그렇습니다. 정이 드니 더 좋아졌고, 더 좋아지니 좋은 점들이 자꾸 보였습니다. 청취자도 좋고, 제작 현장도 좋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좋아졌습니다.
혹시 라디오를 듣지 않으신다구요? 그래도 차를 타고 가다 보면, 거리의 가게에 들르면, 누군가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하면서 가볍게 귀 기울일 수 있는 매체, 그게 라디오입니다. 요즘은 오디오 콘텐츠를 이용하는 분들도 많은데, 라디오를 알게 되면 팟캐스트나 오디오북도 더 가깝게 느껴지실 겁니다.
이렇게 라디오와 정들었던 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체계적이지 못해 아쉬움도 있고, 다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아른거리지만, 이 글에는 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 라디오가 조금이라도 함께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라디오를 늘 곁에 두고 계신 분들께, 이 글이 작은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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