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자의 차이
말과 글자는 무엇이 다를까요? 소리로만 전해주는 라디오 제작을 하려면 우선 알아야 할 것이 말의 특성입니다. 말을 제대로 알려면 말과 글자의 다른 점을 알아야 합니다. 말을 적으면 글자가 되고, 글자를 읽으면 말이 되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미디어는 메시지다.” The media is the message라는 명언을 남긴 미디어의 구루 guru 마샬 맥루한 Marshall McLuhan 은 미디어를 정세도 definition와 참여도 participation의 정도에 따라 핫미디어 hot media와 쿨미디어 cool media로 나누었습니다. 정세도란 정보가 많은 정도를 말하지요. 미디어가 얼마나 정보를 세세하게 전하는 정도고요. 참여도는 수용자를 미디어에 얼마나 몰입하게 하는가 하는 몰입정도를 말합니다. 정세도가 높고 몰입정도가 낮으면 핫미디어, 정세도가 낮고 몰입정도가 높으면 쿨미디어입니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잘 이해가 되면 미디어에 덜 몰입하게 되어 핫 미디어이고, 정보가 적어서 이해하기 위하여 몰입해서 미디어를 이용하면 쿨미디어가 됩니다.
쿨미디어와 핫미디어는 상대적입니다. 라디오와 전화를 비교하면 라디오가 핫미디어고, 텔레비전과 영화를 비교하면 텔레비전이 쿨미디어입니다. 그러나,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라디오는 쿨미디어고 텔레비전은 핫미디어가 됩니다. 라디오는 텔레비전에 비하여 정보가 적고, 더 몰입해서 들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청각은 시각에 비하여 정보의 양이 적고, 더 집중하여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청각을 이용하는 미디어인 라디오는 쿨미디어의 성격이 있지요. 집중해서 상상하며 듣다 보니 라디오를 상상의 매체라고들 말합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라디오의 그런 특성을 살려서 수용자의 상상력을 자극해야 합니다.
말과 글을 같은 방식으로 비교한다면 어떨까요? 글자는 활자로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지만, 말은 읽는 사람의 감정이 담깁니다. '만원'이란 글자는 어느 위치에서도 같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느 부자가 ‘만원’이라고 말하는 ‘만원’의 소리와, 가난한 고학생이 말하는 ‘만원’의 어감은 다릅니다. 고학생의 ‘만원’이라는 소리에는 적지 않은 돈이라는 해석이 담기게 되지요. 부자가 말하는 ‘만원’은 아주 작은 돈이라는 느낌이 담기게 됩니다. 이처럼 말이란 말하는 사람의 감정과 글자에 대한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말이 글자보다 정세도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자는 수용자가 읽으면서 해석해야 하니까 몰입도가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말과 글을 비교하자면, 저의 주관적인 해석입니다만, ‘말’을 핫미디어, ‘글자’를 쿨미디어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방송에서의 ‘말’은 ‘글자’인 방송원고를 출연자가 해석해서 소리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라디오에서 출연자들은 글자를 음성부호에 따라 단순히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알아내고,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올바른 해석을 하고, 그 해석의 느낌이나 의미를 담아서 소리로 표현해 냅니다. 글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는 상태이고 말은 글자를 해석해서 감정을 표현한 상태가 됩니다. 독일의 ‘라디오피처’ Radio Feature라는 책에는 ‘살아 숨 쉬는 글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음성 연기를 다루는 챕터의 제목인데요. 음성연기로 하는 말의 특성을 설명한 표현입니다.
라디오에서 말하기는 ‘읽는다’가 아니라 ‘말한다’라고도 하지요. 책을 읽는 것처럼 표현하지 말고, 말하듯 하라고 합니다. 책을 읽듯이 한다면 말하는 사람과 마이크 사이를 책(원고)이 가리는 모습이 됩니다. 말하듯 한다면, 말하는 사람과 마이크 사이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디오 출연자의 말소리가 청취자에게 직접 전달되겠지요. 청취자는 말하는 사람의 느낌을 그대로 생생하게 받아들이게 되고요. 그래서 라디오 출연자는 원고를 읽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원고의 글자를 살아 숨 쉬게 해야 합니다.
글자를 말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사람 중에는 성우들이 있습니다. 다른 데서도 말씀드렸지만, 성우들은 말을 통하여 성격이나 감정뿐만이 아니라, 의상, 날씨, 계절, 공간의 크기 등을 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말로써 모든 것을 표현한다는 믿음을 갖고서 연기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라디오 진행자나 출연자는 연기력 못지않게 독해력도 중요합니다. 원고를 제대로 해석해서 그 맛을 살려서 표현해야 하니까요. 그래야 글자가 살아 숨 쉬게 되기 때문입니다. 살아 숨 쉬는 글자가 방송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