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적응하게 돼있어요 2 - 배우 송승환

보이지 않아도 보이네 ⑧

by 김승월

"많이 힘들었어요."

연극 <더 드레서>를 본 뒤 분장실에 찾아가서 인사했더니, 송승환이 그렇게 말했다.

"연극은 두 시간 완벽하게 몰입해서 연기하잖아요. 잘 안 보여서 더 집중해야 하니까 더 힘들죠."


그가 심한 시각장애를 겪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공연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혹시라도 순간적으로 어긋나는 장면이 나오면 어쩌나.


내 시력도 좋지 않아, 독일제 에센바흐 고성능 망원경을 가져가서 표정이나 몸짓, 손짓을 확대해서 봤다. 다행히, 아니 놀랍게도 눈에 띄는 실수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확대한 얼굴에서도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확인하려는 마음 대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가 연기한 인물은 드레서 ‘노먼’이다. 헌신했지만 인정받지 못한 인물. 배신감과 분노가 폭발하는 장면에서 그는 무대 위에 쓰러져 절규한다. 그 장면이 너무 힘들어 보여 물었다.

“그래서 힘들었다고 하신 건가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감정선이 끓어오르면 그런 연기는 자연스럽게 돼요, 암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어렵죠."


암전. 무대 위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조명이 있으면 형체라도 볼 수 있지만, 암전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11·4처럼 외워요, '앞으로 열 한 걸음 걸어가, 왼쪽으로 네 걸음 가서 대사'하는 거죠."


그에게 무대는 눈으로 보는 공간이 아니다. 숫자로 외운 기억이다. 3·4, 6·4, 11·8 같은 숫자들이 분장실 거울에 적혀 있다.

"연습할 때였어요. 무대 중앙으로 나오는데 턱이 있어서 걸려서 넘어질 뻔했어요. 무대팀에서 바로 거기다 슬라이딩 램프를 만들었지요."


암전에서는 한 발만 틀려도 무대가 낭떠러지가 된다.

"어둠 속에서 계속 반복 연습해요. 처음엔 공포스럽지만, 반복하다 보면 공포가 사라지죠."


난타 감독으로, 문화행사 기획자로 여전히 분주한 문화활동을 하는 그가 왜 연극을 고집할까.

"배우로서 연극이 제일 좋거든요. 눈이 안 좋아서 연습기간이 긴 게 특히 좋고요."

영화나 TV 드라마는 한컷한컷 찍지만 연극은 연결해서 하니까 배우로서 몰입할 수 있어서도 좋다고 한다.


KakaoTalk_20260114_142228600_02.jpg 왼쪽부터 선생님 박근형과 드레서 송승환

<더 드레서>는 영국의 한 지방 극장에서 227번째 '리어왕' 공연을 앞둔 노년의 대배우 '선생님'과 그를 16년간 헌신적으로 보필해 온 의상 담당 '드레서(노먼)'의 이야기다. 선생님이 개막 직전 대사를 잊어버려 소동이 벌어진다.


지금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막이 오른 무대는, 이 작품에서 그의 네 번째 도전이다. 이번에는 익숙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맡아왔던 ‘선생님’이 아니라 동선이 훨씬 많은 드레서 ‘노먼’을 택했다.

“뭔가 새로워지고 싶었어요. 제가 역을 바꾸고 새로운 사람을 모시면, 연극 분위기도 달라질 것 같았거든요.”


선생님과 드레서는 이 연극의 두 기둥이다.

" 나이 든 관객은 선생님 입장에서 연극을 보고, 젊은 관객은 노먼 관점에서 연극을 보게 됩니다. 선생님은 괴팍하고 소리 지르는 게 많아 감정이 힘들고, 노먼은 동선이 많아서 많이 움직여 몸이 힘들어요."

그는 이번 연극에서, 몸이 더 힘든 쪽을 택한 것이다.


무대 위에서 상대역의 소리를 듣고 상대와 호흡을 맞출 수 있지만,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 얼굴을 보지 못하고서, 어떻게 세밀한 리액션을 할 수 있을까.

"연습할 때, 상대의 표정을 촬영해 둬요, 상대 표정을 외워두고, 그에 맞추어 저도 호흡을 맞춥니다."


연기할 때 장애를 의식하냐고 물었다.

"거의 잊어요. 물입하고 있으면."


들을 수 있고 형체는 보이니까, 웬만한 연기는 다할 수 있단다. 첫 번째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 "인간은 적응하게 돼있어요."가 떠올랐다. 담담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오래 다져진 확신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시각장애인 배우’로 기억되는 것을 불편해한다. 그 인식이 관객의 몰입을 방해할까 봐 걱정해서다.

“시력 나쁜 송승환이 아니라 그냥 ‘배우 송승환’으로 봐주면 좋겠어요.”

“언제까지 연기하실 생각이세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답이 돌아왔다.

“죽을 때까지요.”


암전 속에서 그는 오늘도 앞으로 열한 걸음, 왼쪽으로 네 걸음을 옮긴다.

어둠은 그의 발길을 가로막지 못한다.


KakaoTalk_20260114_142228600_05.jpg 드레서 노만 역의 송승환


브런치 북 <보이지 않아도 보이네>

다음 주에는 시각장애인에게 노래가 주는 힘에 대해 나눕니다.

'노래는 힘이 되어_테너 윤용성'도 함께 해주세요.


김승월의 브런치북에서는 '겪고 나서 깨달은 이야기,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들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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