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기술
지난해 연말이었다. 회사 일을 도와주는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눈이 퉁퉁 부어서 왔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개가 죽어 며칠 울며 지냈단다. 그분 어머니도 그리 슬피 울며 그랬단다. “내가 우리 엄마 돌아가셨을 때도 이만큼 울지 않았어”. 그러다 보니 그 집 살림으로는 과하게 관을 마련해서 화장했단다. 어제는 삼우제 지냈고, 사십구재도 지내겠다며 울먹였다. “10살 되던 올해, 개 하고 가족사진 찍으려고 했어요. 올해 초, 직장 그만두는 바람에 돈이 쪼들려 그만……”.
반려동물이 엄청난 위안을 주는 것을 키워보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애초 개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반려 동물 기를 돈이 있으면,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 내게 친구가 권했다. 혼자 적적하게 집 지키시는 어머니를 위해서 개를 길러 보라고 했다. 어머니도 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다. 두 달 된 새끼 시추를 데려오던 날에 짜증까지 내셨다. “무슨 고생 더 시키려고 개를 데려왔냐?”
‘자코’라고 불렀다. 코가 납작해서. 납작코를 줄여 이름 지었다. 자코는 그다지 영리하지 못해서 배변 가리기 훈련도 쉽지 않았다. 집안 이 구석 저 구석에 오물을 쏟아 냈다. 어머니는 방에 들어오는 자코가 싫어서 빗자루로 쓸어내듯 내몰곤 했다. 그러던 어머니가 조금씩 달라졌다. 구박하건 말건 자코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옆에 앉아주고, 눈물 흘리기라도 하면 어머니 눈가를 핥아 주었다. 어머니는 손주와 놀듯, 자코와 이야기하며 지내게 되었다. 자코를 잃어버렸던 던 날, 어머니는 숨 넘어갈 듯 울부짖었다. “자……코가…… 없어졌어.”
자코가 새끼 한 마리 낳았다. 다람쥐 같이 생겨 ‘다람’이라고 이름 지었다. ‘다람’이는 머리가 지독히 나빴다. 뭐 하나 훈련시킬 수가 없어 평생 배변을 가리지 못했다. 게다가 성질은 급하고, 욕심이 사납고, 앞니는 삐죽이 튀어나왔고, 다리는 심하게 휘었다. 게다가 못나게 굴기까지 했다. 다른 식구는 거들떠보지 않고, 오로지 아내에게만 해바라기였다. 아내가 퇴근하면 내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앉거나 누우면 아내 몸에 자기 몸을 찰싹 달라 붙이고는 같이 앉거나 누웠다. 누군가를 한결같이 바라보는 데,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내도 다람이를 끔찍이 예뻐했다.
개 키우다 보니, 속상한 일이 잦았다. 시도 때도 없이 어린애처럼 때 쓰고 짖어댔다. 아래층 이웃한테서 한 밤중에 항의 전화도 받았다. 미운 짓 할 때에 때릴 시늉 하면 맞을 자세로 움츠렸다. 그러다가도 금세 장난치며 안겼다. 꽁하지 않았다. 그 말하니 딸이 그런다. “꽁할 때도 있어. 근데 몇십 분 지나면 다 잊나 봐.”
개 키우며 못할 짓이 이별하는 일이다. 자코는 12살이던 해에 가버렸다. 자코가 가기 한 해 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일이다. 시각과 달리 청각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 있다는 말대로였다. 어머니 임종을 앞두었을 때다. 어머니가 가쁜 숨 몰아 쉬며 너무 힘들어하셔서 그만 작별인사 드렸다. “어머니, 먼저 천국에 가 계세요. 저희도 곧 따라갈게요.” 어머니께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셨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숨을 거두셨다.
자코가 떠나 던 해에 신장병을 심하게 앓았다. 하루는 퇴근해 들어오니, 눈도 뜨지 못하고 주검처럼 누워 있었다. 뻣뻣하게 뻗친 다리를 보니 곧 죽을 것 같았다. 며칠을 앓아 초췌해진 몰골이 안쓰러워 가슴에 살며시 손댔다. 미약하게 심장이 뛰었다. 나직하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자코!’. 순간, 자코의 굳은 다리가 약간 움직였다. 한번 더 불러 주었다. 다시 움직이는 듯했다. 그리고는 몇 분 후 떠났다. 숨 넘어가는 순간에 안간힘으로 작별 인사를 한 것이다.
교감이나 소통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하는 거다. 마음을 다해 대하다 보면 어떤 방법으로든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개한테서 그리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