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프로그램 아이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소재의 한계를 느끼기 쉽습니다. 소리로만 만들다 보니, 음악에 대한 이야기나 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프로그램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사라진 한국의 소리나 향토민요 같은 소재로 라디오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합니다. 라디오의 청각 매체 특성을 살린 기획이니 나쁘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은 오디오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고정관념입니다. 소재의 장벽이 없어야 상상력 넘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이 '테마파크'라면, 라디오는 '우주'예요.” 성우 안지환 씨가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차이를 비교한 말입니다.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라디오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우주처럼 넓어지겠지요. 선택의 범위가 넓어지면 선택하기가 오히려 힘들어지도 합니다만.
‘무지개’를 다룬 프로그램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고, 보이기만 하는 무지개를 라디오에서 다루었어요. 1991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라디오 다큐멘터리스트들의 회의인 ‘국제피처회의’ International Feature Conference에 참가했었는데요, 동유럽에서 온 여성 PD가 ‘무지개’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색소폰 연주에 맞추어 시와 같은 원고를 읽는 형식이었습니다. 언어의 장벽이 있어서인지, 쉽게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소리와 빛깔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였습니다.
‘색청’ 色聽 과 ‘음시’ 音視 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색청은 색을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고, 음시는 소리로 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소리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나 형체가 떠오르고, 특정한 장면을 보면, 특정한 소리를 상상하게도 됩니다. 색청과 음시를 예술의 세계에 도입하는 ‘색채음악’은 예로부터 시도되었습니다. 18세기에 뉴턴은 음계의 ‘도, 레, 미, 파, 솔, 라, 시’ 7 음계를 무지개의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7가지 색과 대응시켰습니다. 악기의 음색을 빛깔로 연관 짓는 이도 있습니다. 주관적 해석이라서 일반화하기는 쉽지 않지만 소리에 대한 상상의 세계를 넓혀주는 자극은 됩니다.
그 해 국제피처회의에서 들었던 가장 색다른 프로그램 소재는 ‘콘돔’입니다. 독일에서 만들었는데요, 콘돔의 유래, 역사, 종류, 사용법애 대하여 거리낌 없이 소개합니다. 인터뷰이가 콘돔 착용감에 대하여 말할 때는 청중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유럽에는 라디오 PD에서 여성들의 비율이 한국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들도 즐겁게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던 방송 소재였습니다.
선정적인 이 이야기를 매 학기마다 여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들려주었습니다. 학생들의 상상의 틀을 깨주기 위해서지요. 한 번은 ‘콘돔’에서 자극을 받았는지, 어떤 팀에서 ‘브래지어’에 대하여 프로그램을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묘한 기대를 하고 들었는데요, 브래지어가 여성의 신체를 구속하고,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성인식을 고착화시킨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진지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참고로 1997년 국제피처회의에 발표한 라디오 다큐멘터리의 아이템을 살펴볼까요. 방송사에서는 소재와 비슷한 개념으로 '아이템'이란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 당시 참가했던 홍동식 전 MBC 라디오 PD 가 정리한 것입니다.
1). 공개하기 곤란한 제작자 자신의 성문제 관련 피처 (노르웨이 “Self portrait with microphone”)
2) 마치 연극 같은 완전 픽션 드라마 (영국 “Hinterhands")
3) 염색, 수술 등 여러 방법으로 미를 추구하는 인간군상의 추한 모습을 거울을 화자로 해서 묘사 (크로아티아 “To the bottom of the mirror)
4) 신시사이저 음악을 깔고 고전시 낭독 (헝가리 “Lament of Mary")
5) 나도 한마디 같은 고해성사 피처 (아일랜드 “Confession")
6) 어느 화가의 색깔에 관한 진지한 탐구를 음악과 그 화가의 독백으로만 묘사 (폴란드 “Something is and something lacks")
운동경기에서 선수들이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면 움츠려 들지요. 제 기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장애인이 장애를 지나치게 의식하면 장애에 갇힙니다. 물론 라디오프로그램으로는 뭔가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 한계를 약점으로 인식하면 소재의 빈곤에 시달리게 됩니다. 한계를 의식하지 말아야 상상의 자유를 누리며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 아이템을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