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체리향기>
아주 사소한 일로 죽음을 결심했을 때가 있었다. 마침 새로 받아 온 이주 치의 우울증 약이 있었고, 이 약을 모조리 입에 털어놓고 죽기로 했을 때의 이야기다. 서울대입구에 위치한 스터디 카페 8번 자리에 앉아서였다. 새삼 내 인생이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초라한 삶이라는 게 너무 분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게 부러웠던 날이었다. 'Seoul Univ'라고 적힌 점퍼를 걸치고 공부를 하던 한 남자는 뭐가 잘 안 풀렸는지 머리를 부산스럽게 털고,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그러면 안 되지. 남부러울 것 없는 학교에 들어갔잖아, 라며 속으로 시기심을 느낀 뒤 나는 다시 노트북 화면을 봤다. 그 당시 쓰고 있었던 시나리오는 2막 다음으로 써질 기미가 안 보였고, 읽고 있던 책은 표지만 봐도 신물이 났다. 전부 부질없고 화가 나서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냈다. 딱 한 개비 피우고 죽기로 결심했다. 담뱃갑을 열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담배가 너무 많이 남았다. 담뱃값도 비싼데 이걸 다 못 피우고 죽자니 억울했다. 누군가에게 기부하자기엔 남이 이득 보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안 죽었다. 4,500원이 아까워서. 안 죽었다.
삶은 이런 것이다. 사소한 걸로 죽네, 마네, 하는 게 인생이다. 여기 우리네 삶과 비슷한 영화가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의 1997년작, <체리향기>를 들여다보자. 나와 비슷한 인간이 또 있다.
차를 끌고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는 남자. 이 남자의 이름은 바디. 바디는 지나가는 남자가 외친 일꾼이 필요하냐는 말에 괜찮다고 답한다. 평범한 일꾼은 바디에게 필요하지 않다.
그는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기로 결심했다.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구덩이에 누우면, 다음날 자신의 시체 위로 흙을 덮어줄 사람을 찾고 있다. 물론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말이다. 그가 제시한 액수는 20만 토만. 우리 돈으로 57,000원 정도의 돈이지만, 이란에서는 통닭 50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다. 나에게 제안했다면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남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차에 태운다. 그러곤 일상적인 대화로 시작해서 끝은 자신의 자살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자살하려는 바디는 초연하고 덤덤하다. 슬프거나 화나 보이지 않고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살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 데 몰두한다. 좋은 차를 몰고 깔끔한 행색의 그는 어떤 사정이 있어 자살하려는 걸까.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지만 그의 자살이 성공할지 궁금해진다.
첫 번째로 바디의 차에 탄 젊은 군인은 그의 부탁을 듣다가 결국 도망친다. 그가 도망치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돌아가던 바디의 차는 작은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바디의 차를 밀어준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다. 그 이유는 밑에서 다시 서술하겠다.
두 번째로 차에 탄 신학생은 설교를 늘어놓았다. 자살은 어디에서나 죄라고 말한다. 남을 죽이는 것이 살인이듯, 자신을 죽이는 것도 살인이라 덧붙인다. 이에 바디는 말한다. 자살은 죄라고. 하지만 불행하게 사는 것도 죄라고 말한다. 또 신은 자비하고 위대한 분이라 자신이 고통받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라 말한다. 바디는 남을 괴롭히는 것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죄가 아닌지 묻는다.
어려운 질문이다. 괴로움이라는 게 실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괴로움은 인간을 따라다니며 고통을 준다. 이에 인간은 괴로움이라는 악랄한 자에게 해를 가하는 대신, 괴로움에게 벗어나기 위해 죽음과의 손을 잡아 괴로움에게 벗어난다. 이는 정당방위 아닌가? 하지만 이는 곧 살인이라는 또 다른 죄가 된다. 사람들 말로는 죽음과 손을 잡지 않아도 괴로움이라는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데, 죽음이라는 행위는 너무 과잉방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디는 신학생의 말을 설교로 치부하고, 차에서 내려준다.
마지막으로 차에 탄 사람은 자연사 박물관의 직원 바게리다. 그는 어린아이들에게 보여줄 메추라기를 들고 차에 탔다. 그는 바디의 계획을 듣고, 자신도 결혼한 직후에 세상을 뜨려 했었음을 밝힌다. 그는 자살하기로 결심한 새벽에 어느 농장에 도착해 나무에 밧줄을 던졌지만 계속 걸리지 않았고 결국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동여맨다. 그때 그의 손에 체리가 만져졌다. 그는 체리를 계속해서 먹었고, 태양이 떠올랐다. 그때 아이들이 등교를 하다 말고 나무 밑에 서서 그를 쳐다보며 나무를 흔들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나무를 흔들었고 아이들은 체리를 주워 먹었다. 그는 체리를 가져와 아내와 같이 먹었다. 그리곤 다시 살게 되었다. 단지 보잘것없는 체리 하나에.
바게리는 그의 제안을 수락한 유일한 인물이다. 바디는 이미 떠난 그에게 다시 찾아가 재차 말한다. 살아있을지 모르니까 돌멩이를 던져봐요. 어깨도 흔들어 봐요. 꼭 오셔야 합니다. 바게리는 꼭 그러겠노라 약속하고 그를 떠난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는데도 기뻐하는 내색이 없는 바디는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이윽고 밤이 되고, 바디는 봐 뒀던 구덩이로 가 눕는다. 그리곤 밤하늘의 달을 쳐다본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열린 결말이지만, 바디는 살았을 것이다. 기껏 흙을 덮어줄 사람을 찾았는데, 바디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허무하다고? 그게 삶이다.
작은 구덩이에 차바퀴가 빠졌던 바디는 모르는 이들의 도움을 통해 구덩이를 빠져나간다. 또 바디는 처음 만난 박물관 직원의 말을 듣고 생명을 구한다. 비단 영화만이 아니다. 이 세상도 그렇다. 얼떨결에 도움을 받고 얼떨결에 계속 길을 걸어간다.
영화에는 줄곧 흙이 나온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좋은 것은 전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나온다. 떨어지는 흙과 바디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장면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바디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가 아니다. 흙이 식물을 자라게 하고 땅을 디딜 수 있게 하고 집을 지을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바디는 쓸모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도, 당신도.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제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내가 죽기를 포기했던 그다음 날, 나는 담배가 다 떨어졌고 좋은 시나리오는 여전히 써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살아갔고 카페 시간이 끝나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
인생은 울퉁불퉁하고 험한 자갈길을 달리는 바디의 차와 같다. 가끔은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막다른 길에 부닥치기도 한다. 하지만 길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길만 길이 아니다. 길가의 흙먼지 속 달콤한 체리 향기. 그걸 다시 맡기 위해 우리는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