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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얼굴들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말의 폭력.

by 윤희웅

1. 연습실이라는 이름의 작업장.

연습실 문을 열 때마다 나는 그곳이 노동 현장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겨울이면 입김이 새어 나오고, 여름이면 땀이 등에 흥건히 젖는 이곳에서 우리는 하루 네 시간 이상, 최소 두 달 동안 몸을 움직인다. 대본을 외우고, 동선을 조율하고, 감정과 호흡을 맞추고, 장면을 완성해 나간다. 이것은 명백한 노동이다.

대본 한 줄을 외우기 위해 지하철에서 중얼거리고, 퇴근길에 지적받은 장면을 상기하고, 새벽에 깨어 장면을 복기한다. 연습실에서는 같은 동작을 수십 번 반복하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뛴다. 무릎이 까지고 발목이 삐끗해도 계속한다. 연출의 "다시”라는 말이 떨어지면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모든 시간이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두 달간 매일 네 시간씩, 총 240시간이 넘는 노동 끝에 내 손에 쥐어지는 출연료는 30만원.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주일치에도 못 미친다. 최저 시급의 절반의 반도 되지 않는 금액을 보며 나는 늘 같은 질문을 되뇐다. 내 노동은 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가?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


이 말은 마치 주문처럼 모든 부당함을 정당화한다. 좋아서 한다는 이유로 정당한 대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 예술은 직업이 아니라 취미라는 듯, 우리의 시간과 노동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이 말은 결국 폭력이다. 또, 누군가는 말한다. 무대 위에서 받는 박수가 보상 아니냐고. 하지만 박수로는 밥을 먹을 수 없다. 환호로는 월세를 낼 수 없다. 감동으로는 병원비를 낼 수 없다.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꿈만으로 배를 채울 수는 없다.


연습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공장 노동자의 손이 기름때로 물들 때 우리는 그것을 노동이라 부른다. 사무직 노동자가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야근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연습실에서 몸을 던지고, 목소리를 쥐어짜고, 감정을 소진하는 이 시간은 왜 노동이 아니란 말인가.

2. 예산표의 맨 아래, 지워지는 이름들.

작품을 올리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삭감되는 항목은 언제나 배우 출연료다. 지원금을 받아 예산을 짜는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극장 대관비, 무대 제작비, 음향 감독비, 조명 감독비가 차례로 기록된다. 이 항목들은 절대 줄일 수 없다. 모두 정당한 임금이고, 전문성을 인정받는 노동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마지막 줄, 배우 출연료에 이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배우들은 이해해 줄 거예요. 다들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연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너무 적은 거 아니냐고 말했지만, 다른 항목을 줄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무대는 안전 문제가 있고, 조명과 음향은 전문가의 기술료를 인정해야 하고, 극장비는 고정비용이니까. 결국 배우 출연료만 그대로 확정되었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가 붙지만, 사실 더 정확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업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배우의 노동을 '조정 가능한 항목'으로 취급해 왔다. 무대는 돈을 주고 만들고, 조명은 돈을 주고 켜고, 음향은 돈을 주고 튼다. 그런데 정작 무대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임금 없는 노동’이 요구된다. 이것은 지원금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 판단의 문제다.


배우의 노동은 비용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저 열정의 연장, 취미의 변주로 가볍게 여겨진다. 공연 포스터에는 배우의 얼굴이 가장 크게 실리지만, 예산표에서는 배우의 몫이 가장 얇다. 이 모순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견뎌왔다. 연습이 길어지면 밥값조차 아껴야 하는 날들이 생긴다. 연습실 한편에 놓인 과자 봉지를 여섯 명이 나눠 먹으며 ‘저녁은 집에 가서’라고 웃어넘기던 밤들. 그 웃음 뒤에는 말하지 못한 배고픔과, 인정받지 못한 노동의 무게가 있었다. 이것이 예술가의 삶이라고, 이것이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이것은 감내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3. 작품과 생계 사이, 반복되는 추락

나는 일 년에 몇 작품을 할지 모른다. 오디션에 붙을 수도, 떨어질 수도 있다. 작품이 잡힐 수도, 안 잡힐 수도 있다. 이 불확실성은 듣기엔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계를 흔드는 불안정성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배우들이 작품을 기다리는 동안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카페, 편의점, 행사 스태프, 택배 상하차, 전단지 돌리기, 연극교실 강사 … 다양한 노동을 경험한다. 하루 벌어 하루를 잇는 삶 속에서, 작품이 들어오면 기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진다.


어느 날,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던 중 연출에게서 갑작스런 메시지가 왔다. 오늘 극장 사정상 오후 5시부터 연습합니다. 나는 앞치마를 벗고 점장에게 달려갔다. 죄송한데 오늘 일찍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점장은 이해해 주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조만간 잘리겠구나. 이게 몇 번째인지. 연습은 늘 예측 불가능하고, 일정 변경은 일상이다. 아르바이트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로 한 달 뒤, 나는 그 카페에서 해고당했다. ‘미안한데, 우리는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점장의 말은 정당했다. 나는 비난할 수 없었다. 그저 연극과 생계, 두 가지를 동시에 지킬 수 없다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작품이 끝나면 수입은 끊긴다. 그러면 다시 알바를 구한다. 그러다 두 달 뒤 또 작품이 생기면 그 알바도 그만둬야 한다. 이런 순환 속에서 나는 계속 무너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을 할수록 가난해진다. 무대에 설수록 통장은 텅 비어 간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다시 말한다. ‘누가 시켰니? 다 네가 좋아서 하는 거잖아.’

이 말은 책임을 배우 개인에게 돌리고,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열정 탓'으로 바꿔버린다. 이 말이 반복되면 스스로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내가 정말 좋아서 이 고단함을 견디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핑계로 착취되고 있는 것인지. 공연이 끝난 날, 로비에서 친구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너는 좋겠다. 꿈을 잃지 않고, 좋아하는 일은 계속하니까!’


그 순간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좋아한다는 건, 왜 이렇게 자주 나를 가난하게 만드는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의 노동은 왜? 지워져야 하는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나는 매일 균형을 잃는다. 연극을 포기하면 생계가 안정될까? 하지만 연극을 포기하고 나면 내게 무엇이 남을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늘 같은 자리를 맴돈다. 그리고 결국 다시 연습실 문을 연다. 좋아서가 아니라, 포기할 수 없어서.

4. 바뀌어야만 하는 세계를 향하여

나는 이제 이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이 말은 배우의 가난을 개인의 취향 문제로 치환하고, 구조적 문제를 은폐한다. 이 말은 우리가 받는 모든 착취를 합법으로 만들어 준다. 이 말은 우리가 스스로를 희생해도 된다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예술가의 노동을 열정페이 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우리가 좋아서 한다는 이유로 누군가 우리의 임금을 줄여도 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좋아하는 일이어도 생계는 필요하다.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술가라서가 아니라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거창한 특혜가 아니다.

예술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고, 배우의 몸은 그 거울의 표면이다. 이 표면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연극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대 위에 서는 사람이 먼저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 배우가 "너희가 좋아서 하는 연극이잖아"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세계.

-. 연습실의 시간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당당히 인정받는 세계.

-. 작품을 만드는 일이 곧 생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 세계.


연극은 배우의 열정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배우의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배우의 몸이 무대를 지탱하는 세계라면, 그 몸 또한 보호받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좋아해서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온몸을 걸고 예술을, 연극을 지켜온 노동자들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말은 더 이상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이 우리의 권리를 박탈하는 주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세계, 열정과 생계가 대립하지 않는 세계를 우리는 만들어야 한다.

나는 오늘도 연습실 문을 연다. 하지만 이제는 침묵하지 않겠다. 이 글이 작은 목소리가 되어, 같은 고통을 겪는 동료들에게 닿기를, 그리고 언젠가 이 구조를 바꾸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나는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비정규직 노동 수기에 최우수상에 당선 된 글입니다. 젋은 배우들이 경제적 이유로 연극 현장을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작성 했습니다. 배우들이 하는 일은 예술입니다. 예술을 돈으로 환산 할 수 는 없겠죠. 하지만 배우도 사람입니다. 배우의 일이 예술이며 동시에 노동임을 배우도, 업계도, 사회도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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