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면 물론 호빵도 생각나지만, 아무래도 나는 목욕탕이 먼저 생각났다. 평일 오후 목욕탕은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넓은 목욕탕에서 혼자 하는 목욕은 임금도 부럽지 않은, 신선놀음이었다. ‘거울 위에 세신 25,000원’이라는 문구를 열탕 안에서 한동안 바라봤다. 차가운 물수건을 머리에 올린 나의 모습도 거울에 비쳐졌다. 순간 내 모습에서 그 옛날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언제였을까, 거리 곳곳에 눈이 쌓여있고, 도로는 빙판길이었던 추운 겨울이었던 것만 기억난다. 아마 설날 며칠 전 휴일이 아니었을까 예상해 본다. 어머니는 샛별이 아직도 반짝이는 이른 새벽에 우리 형제들을 깨웠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간 마당에는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힐끔 쳐다보며 마른기침 소리와 함께 이내 길을 나섰다. 가로등도 없던 어두운 골목길에 미끄러운 빙판길만이 곳곳에 숨어있었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우리는 목욕탕으로 고난의 행진을 했다. 넘어진 동생을 일으켜 세우려다 같이 넘어지면서 까르르 웃고, 때로는 일부러 밀기도 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아버지 등 뒤에서 수없이 밀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앞서 걷던 아버지가 우리를 바라보며 장난치지 말고, 빨리 오라는 수어를 했다. 아버지의 수어에 화들짝 놀란 형제들은 아버지 뒤를 따라 황급히 걸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른 새벽부터 목욕탕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목욕탕 문이 열렸다. 목욕하기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는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밀쳐가며 탕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버지는 운 좋게 좋은 자리를 선점했고, 손을 흔들며 우리를 불렀다. 얼어있던 몸이 뜨거운 탕 안에 들어가니 온몸 구석구석 뜨겁고, 간지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호들갑을 떨며 탕 밖으로 나오려는 우리를 아버지는 손을 당겨 탕 속 깊이 넣었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손이 할아버지 손처럼 쭈글쭈글할 때쯤 탕 밖으로 밀어냈다. 한 명씩 아버지 앞으로가 앉았다. 아버지는 이태리 타월 안에 수건을 넣어 두툼하게 만들어 우리들의 때를 밀었다. 거죽이 벗겨지는 아픔을 눈물을 떨구며 참아야 했다. 살이 까져서 붉게 달아올라야 때밀이는 끝이 났다. 이제 우리들의 복수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커다란 고목에 작은 매미들이 달라붙어 때를 밀었다. 복수는커녕 힘에 부쳐 때를 밀지도 못하고 하나, 둘 도망을 쳤다. 힘에 부친 나는 아버지에게 세신사에게 때를 밀라고 했다. 아버지는 짧게 수어로 대답했다.
“비싸.”
“얼마인데 비싸?”
“몰라, 비싸.”
아버지는 세신 비용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비싸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중에 어른이 되어 돈을 벌면 세신사에게 꼭 때를 밀게 해 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세신 25,000원이라는 간판을 쳐다보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탕 주변을 청소하던 세신사가 말을 걸었다.
“사장님, 세신 좀 하시죠. 잘해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다음에 하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는 세신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