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늦가을, 옛 친구의 결혼식이 있어 정말 오랜만에 해당 모임 친구들을 만나게 됐다.
이들을 처음 만난 게 2007년이니, 알고 지낸 지도 벌써 16년째다. 열여섯, 열일곱. 이만하면 어른이 다 되었다 생각하는 여느 애들과 다름없는 청소년들로 처음 만나, 한 달여간 먼 타지에서 함께 생활을 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과는 반비례로 깊은 우정을 쌓았다.
그걸 증명하듯, 지난 16년이란 세월 동안, 아니, 카카오톡이 처음 등장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 9명이 속한 단체 카톡방이 굳건히 살아있다. 신기하게도. 자주 활성화 되진 않아도, 마치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꽤나 끈질긴 생존력을 자랑한다.
어렸을 적엔, 20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꾸준히 잘 만나고 지냈었지만, 여기저기서 각자의 삶을 사느라 어느새 얼굴을 안 본 지가 7년을 훌쩍 넘어 있었다. 전국 각지에 퍼져있다 보니, 사실 웬만해선 다 같이 모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번 연도에 축하할 일이 많이 생기는 바람에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일부 친구들끼리 만날 기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이게 얼마만인지! 어렸을 때 만난 친구들이라 그런지, 그동안의 세월이 스쳐간 흔적은 남았지만, 그냥 그대로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한데도 어색함이 없다. 생각해 보면 참 어렸던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또 벗 삼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함께 웃음꽃을 피운다.
누군가는 이미 애 둘을 키우는 엄마가 되었고, 누군가는 10년 가까이 사귄 여자친구와 곧 결혼을 앞두고 있고, 누군가는 6년 차 대기업 직장인으로 벌써 수도권에 자가를 마련했단다.
첫째가 내후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엄마는 최근 일을 다시 시작했고, 결혼을 앞둔 청년은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안정적으로 정착 중이고, 벌써 자차와 자가를 마련한 대기업 직원은 부족함 없이 생활하며 앞으로도 그곳에서 그다지 타이트하지 않은 업무와 관대한 복지혜택을 누릴 계획이다.
언제 이렇게 다들 사회적 어른이 되었는지. 이렇게나 잘,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온 그들이, 그들의 지금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대견하기도 하다.
아, 근데 이 밀려오는 씁쓸함은 뭐지?
"너는?! 어떻게 지냈어?"
마이크가 내게로 넘어오고야 말았다. 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이 순간. 피하고 싶었던 이 순간.
난 무엇을 했나? 난 무엇을 이루었는가?
이제야 가고자 하는 길에 발을 겨우 들여놓고, 열심히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눈앞의 모든 게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린 순간을 어떻게 잘 포장한단 말인가. 그 이후 맞닥뜨린 긴 공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예쁘게 정성 들여 땋던 나의 커리어, 그리고 자비 없이 한 번에 싹둑 잘라져 버린 나의 커리어. 항암치료가 모두 끝나고, 충분한 회복을 거쳐 그 두 동강 나버린 잔해들을 다시 이어보려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은 계속해서 그 잔해들을 점점 더 닿을 수 없는 거리로 벌리고만 있다.
"아, 난 -하고, -하고, -하다가, 몸이 좀 안 좋아져서 그만두고, 잠깐 -했다가 지금은 -배우고 있어."
나의 지난 7년 간의 근황을 이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그리고 그 사이 나를 숙주로 삼은 암이란 놈과 나의 치열했던 투병기는 단순히 '몸이 좀 안 좋았던 거'라고 표현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혹시라도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면 뭐라 해야 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러는 친구는 없었다. 아마 내가 더 밝히고 싶지 않아 했음을 다들 눈치챘으리라.
나는 저 짧은 한 문장 속에서도 최대한 무언가를 계속했던 듯이, 나 또한 내 자리에서 바쁘게 사회적 위치를 잡아나가고 있었음을, 무언가를 이루고 있었음을 드러내려 노력했지만, 이 대화 속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사실 이런 시간을 피하기 위해 지난달의 청첩장 모임이나, 여름에 갑작스럽게 잡혔던 모임을 피했다. 귀찮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오랜만에 보고 싶은 마음을 이런 대화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양보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 있을까. 기쁜 일은 직접 축하해주고 싶은데.
이날,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 정말 반갑고 즐거웠지만, 동시에 그 시간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부정적 생각의 코털을 건들기에 충분했다. '비교'로 출발선을 끊는 부정적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꽂힌다. 나는 나 스스로 실패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쟨 저렇게 될 동안 난 뭘 했지? 쟨 지금 저기에 있는데 난 왜 여기지? 난 그동안 뭘 이뤘지? 난 왜 이것밖에 못했지?'... '우울해. 역시 괜히 갔나?'
30대 미혼 경력단절 여성이자 암환자. 그게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