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실패, 뒤쳐짐 - 영혼에겐 목적 달성이다.

영혼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체험이다.

by 조유희

사람들은 성공하고 싶어한다. 인정받고 싶어한다.

해내고 싶어한다. 보상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랑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지 못하면 — 실패했다고 느낀다.


10년을 준비한 시험에 떨어진 사람은, 자신이 부족했다고 느낀다.

열심히 일했지만 승진에서 밀린 사람은, 노력이 배신당했다고 느낀다.

오래 사귄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나 싶어진다.

공들여 올린 글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날은, 내가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아진다.


나도 오랫동안 이들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삶에 대해 아주 오래, 아주 많이 사유했다.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왜 노력해도 보상이 오지 않는가?

왜 고통은 피해가지 않는가?


수년간의 질문 끝에 도달한 답은 — 전제가 틀렸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행복만 원하는가


우리는 흔히 말한다.

행복하고 싶다고. 고통 없이 살고 싶다고.

기쁨만 느끼며 살면 좋겠다고.


그런데 실제로는 다르다.

막상 아무 긴장도 없고, 아무 도전도 없는 유토피아 같은 세계에 던져지면

사람들은 금방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온전히 살아있다는 감각,

그리고 그것이 안전하게 끝난다는 안도감.

그 둘을 동시에 원한다.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 공포영화,

난이도가 높은 두뇌게임, 번지점프,

생존 서바이벌 게임, 극한 모험.


사람들은 스스로 고통공포긴장을 돈을 내고 산다.

그것이 재밌다며 웃으면서.


여기서 하나의 단서가 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짧다는 것이다.

강렬하지만 이 있다.


내가 선택했고, 언제 끝나는지 안다.

그래서 즐길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내가 선택하지 않은 고통,

혼자 오래 견뎌야 하는 고통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구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충분한 인력이 나눠 감당하고,

적절한 시간 안에 끝이 보이고, 쉴 수 있는 여백이 있다면

사람들은 도전하고, 버티고, 심지어 즐길 수 있다.


문제는 고통의 종류가 아니라,

고통의 구조다.



영혼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체험이다


영혼의 차원에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며, 가능성으로 충만하고, 시간도 공간도 없는 온전한 존재다.

결핍이 없고, 제한이 없으며, 원하는 것이 곧 이루어지는 세계.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실패가 무엇인지. 무기력이 어떤 감각인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느낌이 무엇인지.

사랑했지만 닿지 못한 마음은 얼마나 아플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무게가 어떨지.


시공간이 없는 세계에서는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 없으면 감정도 없다.

고통도, 기쁨도, 상실도, 두근거림도 — 전부 이 밀도 높은 3차원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영혼은 지구를 선택했다.

즉각적인 보상이 없는 곳. 질병과 고통이 있는 곳.

노력해도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곳.

불완전함 그 자체를 온몸으로 겪기 위해.


빛을 알려면 어둠이 필요하듯

충만함을 느끼려면 결핍이라는 거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

더 성공해야 하고, 더 행복해야 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영혼이 원한 것이 성공이 아니라 체험이라면

고통을 당하는 것도 체험이다. 실패하는 것도 체험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배신당하는 것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날도,

눈물이 왜 나는지 모른 채 울었던 밤도.

전부 영혼이 이번 생에 오기 전에 원했던 감각들이다.


시험에 떨어졌다. 3차원의 언어로는 실패다.

영혼의 언어로는 — 좌절이 어떤 감각인지 느꼈다.


11년을 사랑했지만 고백하지 못했다. 3차원의 언어로는 용기 없는 삶이다.

영혼의 언어로는 — 11년간 그리움과 설렘을 온몸으로 겪었다.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 체험 완료인 것이다.



관계도 체험이다


사람들은 관계에서 상처받으면 후회한다.

왜 저 사람을 만났을까. 왜 그때 그 말을 했을까. 왜 그렇게 사랑했을까.


그런데 영혼의 언어로 읽으면

그 만남도, 그 이별도, 그 상처도 전부 설계된 체험이다.


집착했던 사람이 있다. 3차원의 언어로는 미련이고 약함이다.

영혼의 언어로는 — 집착이 어떤 감각인지, 놓지 못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겪었다.


배신당한 적이 있다. 3차원의 언어로는 상처고 트라우마다.

영혼의 언어로는 —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 어떤 감각인지, 그 균열이 얼마나 깊은지 느꼈다.


그러니 인연을 후회하지 않아도 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라 서로의 체험을 위해 잠시 같은 무대에 선 존재들이다.


질투도 체험이다. 그리움도 체험이다.

사랑도, 이별도, 혼자인 것도 — 전부 영혼이 원했던 감각들이다.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성공도 체험, 실패도 체험. 행복도 체험, 고통도 체험.

영혼에게는 어느 쪽이 더 가치있다는 위계가 없다.

둘 다 똑같이 "겪었다"는 것만 남을 뿐이다.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것들 — 더 좋은 직업, 더 많은 돈, 더 나은 외모, 성공한 삶.

이것이 과연 영혼의 욕망인가. 어쩌면 그것은 영혼이 원한 것이 아니라,

3차원이 심어놓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영혼은 그냥 모든 감정을 느끼고 싶었는데.

3차원은 "좋은 감정만 느껴야 한다, 성취감을 더 느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의심하지 않고 내면화했다.

그리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실패자라고 불렀다.



늦은 것이 아니다


영혼의 차원에는 시간이 없다. 과거도, 미래도, 나이도 없다.

그런데 3차원에 들어오는 순간 시간이라는 축이 생기고,

우리는 그 위에서 "늦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런데 시간이 없는 존재가 시간 안에 들어온 것이라면

늦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3차원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50대에 처음 그림을 시작한 사람이 있다.

영혼의 언어로는 — 50년을 살아낸 감각이 쌓인 후에야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40대에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다.

늦은 사랑이 아니라 — 그 나이의 깊이로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을 체험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든 늦은 것이 아니다.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고통이 오면, 고통이다. 그냥 그거다.

그냥 느끼면 된다.

왔으면 느끼고, 지나가면 지나간 것이다.


누군가와 헤어진 후 찾아오는 공허함. 이제 공허함과 함께 앉을 수 있게 된다.

"아, 이게 상실의 감각이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저항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싸울 때 오히려 더 오래 머문다.


수용은 체념이 아니다.

이것이 체험임을 아는 사람의 가장 깊은 형태의 자유다.

고통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 영혼의 목적이라면 그 고통은 영혼의 자유의지여야 한다.

나는 이 고통을 체험하기로 했다.


이 인식 하나가 같은 고통인데도 완전히 다른 감각을 만든다.

억압된 고통선택된 고통은 다르다.

똑같이 아프지만, 하나는 갇힌 느낌이고 하나는 열린 느낌이다.

피해자가 아니라 설계자로서 이 생 위에 서는 것.



단, 이것이 이 세상의 구조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삶의 고통을 체험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싶지 않다.

고통이 체험이라는 것이 이 사회 구조가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정의롭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이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고통스러운 것보다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수긍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 체험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같은 고통이라도 다르게 버텨낼 수 있다.


그것이 체험이라는 관점이 내게 주는 것이다.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하지만 이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게 만드는 구조,

쉴 여백도 없이 몰아붙이는 구조, 실패에 낙인을 찍는 구조.


그것은 잘못됐다. 체험이 의미있으려면,

그 체험이 사람을 완전히 부수지 않을 만큼의 조건이 필요하다.


영혼의 언어로 고통을 이해하는 것과, 구조의 언어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

이 둘은 모순이 아니다. 동시에 할 수 있다.


깨달았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근데 뭔가 달라진다.

여전히 아프다. 여전히 힘들다. 여전히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예전에는 고통이 왔을 때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고 했다면

이제는 "아, 이게 왔구나"가 된다.


자책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자책조차 체험이 된다.

완전히 초연해지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무너진다.

다만 무너진 후에 일어나는 속도가 조금 달라진다.

덜 싸우게 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결론은 이것이다


우리 삶은 원래 이렇게 생겼다.

불확실하고, 고통스럽고,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다.

노력해도 결과는 보장되지 않고, 선하게 살아도 고통은 비껴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설계된 것이다.


나는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살아지니까 산다. 하루하루 버텨낸다.

그리고 그 버텨냄조차 체험이다. 목적 달성이다.

고통도, 실패도, 성공도. 영혼의 차원에서는 전부 목적 달성이다.


우리는 지금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왜 와있는지도 기억이 안나고, 공략집도 없고, 세이브 버튼도 없는 극강 난이도의 게임.

근데 어쩌겠는가.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해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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