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 시작 전 아주 잠깐의 뉴욕 여행기
펜실베이니아주는 참 다행히도 한국 운전면허증을 펜실베이니아 주 면허로 교환할 수 있다. 외국에서, 영어로 면허를 다시 딸 생각을 하니 아찔했는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잘되었다 싶었다. 문제는 같은 펜실베이니아주여도 내가 사는 곳에서 영사관 출장소가 있는 필라델피아까지는 차로 7시간이 걸리는 거리. 처음 차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필라델피아를 방문해야 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를 가는 건 내가 가고 말고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결심을 세운 후에 가는 일정을 잡고 짐을 챙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필라델피아는 뉴욕과 매우 가깝지 않던가. 이참에 근무 전에 뉴욕을 한번 갔다가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여 뉴욕의 방문 계획도 같이 세워두었다. 그렇게 근무 전의 짧은 뉴욕-필라델피아 여행길에 올랐다.
생각보다 여행은 시작부터 삐그덕 댔다. 필라델피아까지 버스를 한번 갈아타야 하는 일정에서 우버를 타고 이동한 첫 버스 탑승 지점에서 30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자 반 포기 상태로 잠시 화장실을 들러 나오는 길에 버스 뒤꽁무리를 봤다. 그렇게 허무하게 첫 버스를 놓치고 더 이상은 버스가 없어, 다음 버스를 타는 지점까지 우버를 타고 이동했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4시간 정도를 대기하는 동안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한데 섞여서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이 퍽이나 새로운 경험이긴 했다. 콜라를 한잔 사들고 대합실에 앉아 어느덧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 되었지만, 20개 가까운 플랫폼 중 어디서 필라델피아로 가는 버스를 타라는 안내를 해주는 곳도 사람도 없었고, 눈치껏 물어가며 사람들이 이동하는 쪽으로 가서 간신히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도착한 필라델피아. 아침시간이어서 유달리도 다운타운에 사람들이 많았지만 틈새를 비집고 간단한 은행 업무를 본 후에 영사관 출장소로 이동해서 운전면허 공증 업무를 보았다.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끝난 업무, 한국에 잠깐 온 것 같은 착각을 살짝 느끼면서 뉴욕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 빠르게 뉴욕으로 이동했다.
퇴근시간에 가까울 때 도착한 뉴욕, 미드타운 한복판에 선 버스에서 내려 처음 들어온 뉴욕은 그 겉모습의 화려함 보다도 "언제 한 번은 와보겠지" 싶었던 장소에 처음 오게 된 설렘의 감정으로 나를 압도했다. 한국에서 멀어 쉽사리 여행으로 오기 어려운 곳이지만, 앞으로는 내 모국보다 더 가까울 곳, 뉴욕의 첫인상은 그랬다.
사실 애초부터 뉴욕에 올 때 뭔가를 해야겠다는 여행 목적의 계획은 없이 급히 온 터라, 도착한 순간부터 지하철 노선도를 펼쳐보며 어디 어디를 갈지 정해야 했다. 막상 멀지만 영상물로는 익숙한 뉴욕인지라 어디든 척척 가고 싶은 데가 떠오를 것만 같던 뉴욕의 첫 방문은 생각과는 다르게 막연하기 그지없었다. 펜 스테이션에서 멀지 않은 쪽부터 노선의 좌표를 짚어가며 "앞으로 한두 번 올 곳은 아니니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둘러보듯이 여행해 보자" 마음을 먹고 장소를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때라 미국 어디를 가든 미국에 온 느낌이 나지 않겠냐만은, 이곳은 유달리 내가 미국에 온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서울의 직장생활에 익숙해져서 이미 대도시의 삶은 너무도 잘 체득되어 있었지만, 이방인으로 몸담은 대도시에서 한 발짝 물러 본 사람들은 각자의 일터에서 뒤엉켜 치열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울에 여행온 사람들도 이런 역동적인 모습에 서울을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로 기억하지 않을까 했다. 화려한 뉴욕의 겉모습보다는 사람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힘이 나를 더 압도했던 듯하다.
뉴욕에 와서 사기로 마음먹었던 간단한 물건 몇 개를 산 후에 타임스퀘어로 이동했다. 이곳은 봄이 넘어가면서는 9시는 넘겨야 날이 밤을 향해 가는 터라 긴 여행으로 인한 피로로 깜깜한 하늘밑에 화려한 네온사인을 눈에 담긴 도무지 어려웠지만 거대한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과 광고판이 시선을 조금씩 돌릴 때마다 끊임없이 변해서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앉아 보는 시간을 지겹지 않게 해 주었다. 뉴욕 한복판에 떨어졌다는 생각에 짧은 여행이었으면 눈에 무언가를 담아두고 계속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을 테지만, 이민자가 되어 이곳에 오니 아이러니하게도 화려한 이곳의 모습보다는 한국의 풍경이 다시금 그리워 지곤 했다.
다음날은 이상하리만큼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뭔가 기념비적인 것을 보고 가겠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어차피 언제고 올 수 있을 테니 천천히 돌아보자는 마음을 먹고 산책을 하며 시작했다. 아침 이른 시간 이어서 그런지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에서 가볍게 뛰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고, 운 좋게도 한 명과 간단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역시 사람이 사는 모습은 다 같구나. 다른 사람은 굉장히 심오한 걱정을 붙들고 있는 것 같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도 나와 똑같이 오늘의 일, 앞으로의 생계, 일상적인 걱정의 끈을 늘 붙들고 사는구나" 싶었다
아무래도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이기 때문에 전에 와보지 않아도 뭔가 낯설지 않은 느낌을 구석구석에서 받았다. 아마 월스트리트도 그렇지 않았나 싶은데,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업종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리 각별하게 체감되는 느낌은 없었지만, 화면 혹은 사진 넘어서 익숙한 장소를 직접 눈에 처음 담는다는 경험에 약간의 의미를 두었다.
미국에 와서 긴 시간 동안 있진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굉장히 피부에 와닿게 느끼는 게 이들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남다르다는 것. 길가에 성조기는 과장 좀 보태서 1미터마다 볼 수 있고,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이들한테는 늘 자긍심이자 자랑인 듯했다. 그리고 그 자긍심은 때론 그들에게 잊고 싶은 일이라 해도 쉽사리 넘기지 않고 반면교사로 삼고자 하는 의지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듯했다. 뉴욕 한복판에서 벌어진 20년 전의 비극은 그렇기에 지금도 끊임없이 그 현장에 방문한 많은 그들을 그 장소 자체의 존재로서 교육하고 교훈을 남겨주고 있는 듯하다.
어느 도시나 가장 분주한 지역 중 하나는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기차역, 많은 노선들이 교차하는 지하철역이 아닐까 싶다. 타임스퀘어가 뉴욕에 놀러 온 사람들의 집합소라고 하면 기차역은 이곳 혹은 주변에서 삶의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장소이지 않을까? 전광판 밑에 서서 행선지를 살피고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서울의 그것과 같았다. 이상하리 만큼 뉴욕을 여행하는 동안 "사람 생활하는 모습이 그 속성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셋째 날은 조금 더 여유를 두어 보기로 했다. 반나절 이상을 공원에 앉아 있으면서 도시락도 까먹고 그늘밑에서 낮잠도 자고 그렇게 셋째 날의 대부분을 보냈다. 워낙에 큰 센트럴파크이기에 공원 안에서만큼은 마치 뉴욕에 와있는 느낌보다는 자연 속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이 도시 속의 자연에 평일임에도 중간에 시간 내어 공원을 걷고 동료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은 주어진 선물을 참 잘 활용하고 있구나 싶어 내심 그 여유로움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뉴욕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관광지, 하이라인과 베셀, 도시 한복판에서 곁에 나무와 자연을 얇게 끼고 높은 건물들을 비집고 산책하는 경험을 처음 해본 터라 다른 뉴욕의 장소와 다르게 "다른 곳에선 경험하기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참 이상하게도 저 건물들 밑으로 들어가 걸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아무것도 아닌 도로들이 한 자락 위에서 나무를 끼고 보니 하늘을 날아 도시를 내려보는 듯하여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하이라인을 따라가면 작은 상점들이 모여있는 첼시에 도착하는데, 어쩌면 내가 뉴욕에서 가장 서울의 젊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장소와 참 비슷하다 생각했던 곳이기도 하다. 거리도 멀고 문화와 정서도 다르지만 의외로 공유하고 있는 감각이 꽤나 비슷한 점이 많기도 하다.
더 이상 얻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참 당연히 누리던 것도 어찌나 귀해지는지 이민을 시작하면서 피부로 와닿게 느끼곤 하는데, 어쩌면 한국에 다시 갈 것이라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뉴욕의 한인타운에 잠시나마 들러 한국 음식을 한 그릇 사 먹고 뉴욕 여행을 마무리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그렇게나 거리가 멀지만 이민 와서 가장 서울을 떠올리게 한 뉴욕 여행은 이렇게 짧게 마무리되었다. 미국에서도 나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기에 이렇게 마냥 여행으로 앞으로도 뉴욕을 만날 수 없긴 하겠지만, 마치 앞으로 펼쳐질 미국 생활을 짧게 펼쳐 주는 것 같은 여행을 마무리하고 다시 내 직장과 일터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아직도 근무 시작 전에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남아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