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로 시작하는 첫걸음
처음에 미국에 도착해서 실제로 현실을 맞닥뜨리기 전 까지는 막연하게 "외국생활, 그래 뜻하는 대로 안 되겠지"라고 각오하긴 하나 크게 와닿지는 않는데, 상황을 실제로 마주하게 되면 정말로 뜻하는 대로 되는 게 모래알에서 진주 찾는 수준이니 갑갑한 마음이 커진다.
무사히 비자가 통과되어서 입국하게 되면 용감함과 무지함으로 이젠 미국에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지만 공항문을 나서서 미국땅을 밟는 순간 나는 외국인 노동자 중 한명일 터. 해야 할 것들이 내 앞에 층층시야로 기다리고 있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인지라 경제생활도 해야 하고, 사회생활도 해야 하는데 그 경지까지 갈 것도 없이 기본적으로 의식주의 해결부터가 발목을 잡게 된다.
우선 사회보장번호 (Social Security Number, SSN)을 신청해야 하는데, 무조건 사회보장국에 가서 신청을 한다고 발급해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민비자를 가지고 와서 상대적으로 간단히 해결될 줄 알았지만, 첫 방문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들이 체류신분에 따라 요구하는 서류가 몇몇 가지 있는 데다가 이민비자와는 다르게 비이민비자는 발급이 안 되는 비자의 종류도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한 비자를 가진 경우는 SSN을 발급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에 SSN 이 필요한 다른 업무를 보기 위해서는 SSN이 발급 불가능하다는 서류를 한부 발급받아서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미리 인터넷 및 전화로 비자의 종류에 따라 구비해야 하는 서류를 확인 후에 전부 지참해서 방문해야 한다. 물론 앞으로 하는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그 전화 한 통 하는 것도 이곳에선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속도의 원어민 영어의 홍수 속에 내가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집어내야 하는 영어실력은 물론이요, 원어민 음성을 듣기까지 통화대기시간도 비교 불가 수준이다. 나는 가능한 경우임에도 막상 방문하니 담당자가 "이런 경우는 내가 안 해봤다"라고 접수를 거절했는데, 더러 이런 경우도 있으니, 애초부터 마음을 내려놓고 한 번에 안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접수에 성공하면 확인증을 한 장 주는데 이로부터 2주 정도 후에 실물 SSN가 적힌 카드가 우편 주소로 도착한다.
은행에서 계좌를 열어야 하는데, 이 또한 은행 방문 전에 미리 확인하고 방문하는 게 좋다.
Bank of America 가 계좌를 비교적 수월하게 열어준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지역, 지점 및 담당자마다 너무 상이하니, 미리 방문할 지점 및 은행 홈페이지를 확인해서 필요한 서류를 잘 구비하고 가는 게 좋다 (미국은 사람 by 사람. 항상 대부분의 일이 그러했던 것 같다.) 보통 돈을 한국은행에서 이체해 써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 빨리 열면 열수록 좋아서 운전면허증 및 SSN를 실물 수령하기 전에 계좌를 열고자 하면 더더욱이 미리 의사소통을 한 후 방문하는 게 좋다. 첫 번째 방문한 은행은 거절했고, 이 역시도 두 번째 방문한 은행에서 이민비자와 한국 주소, 미국 임시주소만 확인한 후에 계좌를 오픈해 주었다.
미국은 자동차를 이용해서 이동해야 할뿐더러, 여권, 비자 같은 서류를 일일이 들고 다닐 필요 없이 신분증을 지참하기 위해서라도 운전면허증을 따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주마다 요건이 달라서, 몇몇 주는 한국 운전면허증을 미국 해당 주 운전면허증으로 교환해 주는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따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교환을 하더라도 실물 한국 운전면허증뿐 아니라 미국에 주재 중인 영사관에서 해당 운전면허증에 관련한 사항을 영문으로 번역 및 공증하여 영사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를 지참해야 한다. 영사관에 미리 방문하여 공증을 받고 1~2주 후에 운전면허국에 가서 교환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펜실베이니아주 같은 경우는 현 거주지 주소가 찍힌 우편물 2부, 해당 공증본, SSN 실물카드, 여권 및 비자 (영주권)을 반드시 지참해야 하기 때문에, 이 역시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운전면허국은 서비스가 느리고 불친절하기로 유명한 곳이기에 일단 방문을 하려 하면 거절, 무한정의 대기 및 불친절한 서비스를 각오하고 방문해야 한다. 2번 정도를 거절당한 후에 다시 서류를 꼼꼼하게 완벽히 준비하고 3번째 방문 후에 운전면허를 교환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거주하기 위한 집을 마련해야 하는데, 미국은 자가 아니면 월세 둘 중에 하나로, 월세는 보증금이 많지 않기 때문에 구할 수 있긴 하나, 신용이 없는 초기 정착 외국인으로서 집을 구하는 것도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집을 알아볼 때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나의 예산과 맞는 집주인 아주 여러 명과 대면해서 집을 보고 내 상황을 솔직하게 말해서 조율해야 한다. 실컷 집도, 금액도 마음에 들었는데 신용이 없어서 안된다. 월급 명세서를 들고 와라(내가 월급을 받을 때쯤이면 이미 집을 구해서 살고 있지 않을까?) 등 다양한 이유로 거절당할 각오도 하고 방문해야 한다. 몇 차례 보고 엎어지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이민비자와 고용계약서, SSN를 제시하고 보증금을 내면 집을 바로 렌트해 주겠다 하는 집주인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집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차량도 신용이 없이는 아주 높은 이자를 지불하고 사거나 차값의 전체를 일시불로 내서 구매해야 한다.
중고차의 가격도 현재 오를 대로 올라서 가격적인 메리트도 크지 않던 터라 굉장한 난관에 빠져있었다. 몇 차례 딜러와 이야기를 해 보아도 신용이 없어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율을 부르거나 Co-sign을 요구해서 (미국에 지인이 정말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무지 차를 구매하는데 진척이 없었다. 다행히도 리스 업체를 한 곳 소개받아 비록 전체 금액으로는 이득이 아니지만, 초기정착에 목돈이 드는 만큼 돈을 다 쓰지 않고 조금 확보해 놓자는 의미 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일이 순서가 있다는 것이었다.
SSN을 받아야 이후의 일들이 다 가능하고, 은행 계좌를 열어야 돈을 끌어와서 집도 차도 구매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집을 구해야 주소증빙이 되어서 운전면허를 딸 수 있어 차근차근 해결을 하려다 보니 중간중간이 듬성듬성 비어있는 상태로 두어 달을 보내야 했다. 차가 없어 수시로 우버를 불러야 하고, 집을 구해야 하는데 사는 집이 없어서 지출이 발생하고, 운전면허는 다른 게 된 후에 발급받을 수 있으니 그때까진 차량을 뽑아도 등록이 안되고, 여러 가지로 내 생각처럼, 내가 계획한 우선순위대로 일이 풀려가진 않는다.
사실 처음 와서 그런 부분에서 알게 모르게 갑갑했었는데, 너무 많은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 보니 어느덧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되어 초기 정착의 가닥이 잡혔던 것 같다. 분명히 시간이 해결해 주긴 했지만 문제는 그 시간 동안 직접 혼자 부딪치면서 하나씩 해결하는데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 수 있다는 점도 미리 알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못했다는 데에 있었던 것 같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신분도 비자 외에는 증명이 곤란하고 신용도 없는 외국인이 집을 구하고 차를 사고, 업무를 보는 와중에 그들이 신뢰할 수 있을까 싶은데 막상 내 상황이 되고 보니, 도대체 나를 왜 못 믿어서 이러는 것일까 싶기도 했었다.
환경도, 사람들도, 문화도 뭐 하나 익숙한 것이 없는 먼 곳이지만 이렇게 뭔가 해야 할 것들을 마무리 지어놓고 무던히 지내다 보니 이곳에 익숙해져 갔다. 물론 근무하면서 이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다 보니 이들의 감정과 생각도 점차 이해가 되어서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