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2년 차, 낯선 곳에서 다시 써갔던 나의 이야기
누구에게나 첫 시작은 유난히 선명하게 남는다. 9년 전, 숨이 막힐 만큼 무더웠던 그해 여름. 나는 간호사라는 새로운 직업 세계에 처음 발을 들였다. 많은 신규 간호사들이 그렇듯, 나 역시 설렘보다는 긴장감이,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지금은 조직 문화가 많이 달라졌다고들 하지만, 그 시절의 간호조직은 교육과 부조리가 애매한 회색지대에 뒤섞인 채 ‘통과의례’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던 때였다. 나는 매일 무너지는 자존감을 애써 꿰매며, ‘영 쓸모없지는 않은 간호사’로 기능하기 위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병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나를 이끌던 상사는 손쉬운 표적을 정확히 겨눌 줄 아는 전략적인 명사수였다. 그의 눈에 ‘분위기도 못 맞추는 뻣뻣한 아이’ 였던 나는 그렇게 미운오리새끼의 자리를 단숨에 차지했다. 동료의 실수를 충분히 수습하지 못한 것도, 의사의 잘못을 매끄럽게 정리하지 못한 것도, 혹은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일조차 종국엔 내 탓으로 결론 났다. 나는 간호사가 되기 전부터 마음에도 없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납작 엎드리는 방식에 염증을 느껴왔기에, 그런 식의 사회생활에 능숙한 동기들과 비교하면, 나는 조직 안에서 ‘부적응자’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것 또한 하나의 능력이며, 생존 방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때의 나는 억울하다는 감정만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가며, 유난히 힘든 신규 시절을 견디고 있었다.
며칠 전, 결혼을 앞둔 후배와 잠시 통화하다가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시간이 참 많은 걸 바꿔놨구나.” 그렇게 말하며 잠시 감상에 젖었다. 언제 고민을 좀 덜고 살까 푸념을 한껏 늘여놓으며, 이제는 2년 정도 된 이민 생활에 대한 감상도 터놓았다. 미국에서의 첫 몇 달은 매일같이 감당하기 벅찬 과제를 밀어내듯 살아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날마다 상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문화적인 감각 속에 뿌리내린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 이게 안 되지?” 혹은 “이게 된다고?” 의 연속이었고, 조금 익숙해졌다 싶으면 언제나 커다란 언어의 벽이 제동을 걸었다. 영어가 늘길 기대했지만, 나는 말하기 듣기보다 눈치가 늘어 적게 의사소통하고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는 묵직한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병원에서의 간호사 생활도, 미군에 입대해 훈련을 받고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부대 생활도 점차 익숙해져 갔다. 돌아보면 주변에 몇 없던 한인들도 이기적이기 그지없어 외로웠지만, 그래도 혼자여서 자유로웠고, 버거웠지만 그만큼 나를 가로막는 어설픈 장애물도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 선택한 고독의 시간이 2년쯤 흐르니, 나는 아주 조금씩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게 되었다. 돌아보면 여태껏 나에겐 업무보다 인간을 이해하는 게 더 어려웠나 보다. 사적인 관계는 곧 평판이 되었고, 그 평판이 나의 능력을 규정하는 틀이 되어 나를 조용히 압박하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꽤 오랫동안 없는 재주를 탓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긁어가며 나 자신을 괴롭혔나 보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나는 처음 미국에 올 때부터 마법처럼 낙원이 펼쳐지길 기대하며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나의 결점이 나를 규정하는 전부가 되는 공간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사회생활의 기술은 여전히 미숙하지만, 이곳에선 그런 기술은 나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지 않기에 간호사이자 군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새롭게 다져가며, 이제야 조금씩 나를 진지하게 들여다본다. 그렇게 전에 없던 따뜻한 동료애에 감사함을 느끼며, 이제는 스스로에게 새로운 도전을 허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애써 외면해 왔던 내 마음속 낙원에 비로소 한 줄기 빛이 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