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연꽃으로 피어난 전생의 이야기
아주 먼 옛날, ‘쿠무다’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훗날 부처가 될 사람의 전생이었다. 자비로운 성정을 타고난 그는 평소 늙고 병든 이들이나 거리의 거지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정성껏 돌보았다.
어느 날, 제자에게 버림받은 한 노스승을 마주쳤다. 스승은 병들고 기력이 다해 있었고,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부유하고 힘 있는 제자는 그를 ‘쓸모없다’는 이유로 내쳐버린 것이다. 쿠무다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 스승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얼마 후, 스승은 눈을 감기 전 마지막 말을 남겼다.
“네가 내게 베푼 자비는 언젠가 꽃처럼 피어나 너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를 버린 자의 행위도, 그의 업이 되어 마침내 그에게 되돌아가리라.”
그렇게 쿠무다는 생을 마치고 다른 삶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때, 스승을 버렸던 제자는 노인이 되어, 이번엔 자신이 버림받는 운명에 처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그때 내가 버린 것은 스승님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구나.”
쿠무다는 누군가의 버림받은 몸을 돌보면서도 “이 사람이 나중에 내게 복을 줄지도 몰라” 같은 계산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았고, 벌을 피하려는 두려움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마음이 자연스레 움직이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 진심 어린 행위가 시간이 흐른 뒤, 결국 꽃으로 활짝 피어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공격하면서 말한다. “나는 카르마를 믿어. 저 사람은 반드시 업보를 받게 될 거야.” 하지만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스스로를 선(善)으로, 타인을 악(惡)으로 규정할 자격이 있겠는가? 다른 이를 악하게 여기고 내가 그를 어찌할 수 있다고 오만하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업보를 묵직하게 쌓을 뿐이다.
적어도 나의 경험에 비춰보면 사람들의 동기와 행동, 생각의 흐름은 상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못되게 말할까?”라고 느꼈던 어떤 경우는, 오히려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던 적도 있었던 반면, 친절하고 박식해 보였던 말들이 알고 보니 악의와 조종의 산물이었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저 나에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 내가 생각하는 선의 기준을 조금씩 다듬어갈 다름이다. 어느 순간부터 업보라는 이름으로 남을 판단하거나, 내 분노를 정당화하려 할 때마다 오히려 내 업이 두텁게 쌓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실천하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타인을 들여다보려 하는 충동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내 마음의 결을 먼저 다듬으려 노력한다. ”과연 이것이 선한 의도를 담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인가? “
어쩌면 우리는, 남의 업보를 말하며 나의 분노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동안 정작 자기 자신이 어떤 업을 만들고 있는지는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닐까.
오늘 또 다른 혐오의 장면을 목격한 나는, 다시 묻는다.
“혹시 타인의 업보엔 예민하면서, 본인의 업보에 대해서는 무심하진 않았을까요? “